예수쾌락 불신지루: 2. 누더기를 입은 예수님

빌립보서 2:1-11
2015년 2월 22일 주일 권혁수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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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뉴런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태어난 지 몇달 안된 아기도 엄마가 웃으면 같이 활짝 웃고, 엄마가 울면 같이 운다.  정서 공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사 소통이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감정을 공유할 때 서로 통하는 것이다.

김정운 교수는 사회적 지위가 올라갈 수록 입꼬리가 처진 것은 볼 근육이 마비 됐다는 뜻이라 말한다. 다른 말로 함께 웃고 웃는 공감능력을 점점 상실해 간다는 것이다. 반면에 인상을 찌푸리는 이마의 근육은 많이 쓰면서 주름이 생긴다.

잘 되는 듯 하다.  세상에서 볼 때는 성공한 듯하다. 그러나 더불어 웃을 수 없게 된 것이 행복한 것일까 아닐까? 점점 공감해주는 사람이 줄어들어 외로운 것이 행복한 것일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2:1-2)

마음에 확 와 닿지 않은가?  하나님은 이것이 내 삶에서 구현하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격려, 위로, 교제, 동정심, 자비를 경험하면 같은 생각, 같은 사랑, 같은 뜻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 즉 코이노니아이다.

이 일을 경험하면, 여러분 입꼬리가 내려가겠어요? 올라가겠어요? 그래서 바울이 뭐라 합니까?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교회에 올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가신 분들이, 교회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에는 입꼬리가 올라간 분들이 되기를 바래요. 이게 하나님이 우리가 교회에 왔을 때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이걸 이해하시려면 그 당시 로마의 도시였던 빌립보의 문화를 알 필요가 있다. Joseph Hellerman이라는 신약 학자가 있다. 로마는 고대 지중해를 둘러싼 국가들 가운데 지위가 가장 중요시 여긴 사회였다. 로마의 계층은 노예-해방인 (freed man)-로마 시민-기사 계습-원로원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이 당시의 의복이다. 해방인은 특별한 모자를 쓸 수 있었다. 시민은 토가를 입을 수 있었다. 로마 시민은 상류층은 아니다.  그러나 빌립보에는 로마 시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걸 입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어떻게 쳐다봤겠는가?  기사단은? 토가를 입을 뿐 아니라, 금반지를 낄 수 있었다. 그 반지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해 준다. 요새식으로 하면 take out 종이컵을 들고 있는 셀카를 찍어서 올렸는데, 살짝 금반지가 보이게 하는 것이다. 원로원은? 토가를 입고, 금반지를 낄 뿐 아니라, 자색 줄이 있는 토가를 입을 수 있었다.

어느 역사학자는 “To the Romans, being is to be seen.”  “로마인들에게는 존재한다는 것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이다.”

빌립보 사람들은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불행이라 생각한 것입니까? 사람들 앞에서 명예를 얻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잃는 것이 가장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3절에서 “겸손한 마음으로”라는 말씀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다.  로마에서 “겸손해진다”라는 것은 단순히 마음 자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류층의 지위를 잃고 떨어진 것을 “겸손해진다 humbled”라고 말한다. 그래서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를 8절에서는 예수님이 “자기를 겸손하게 하시고"를 우리 성경에서는 “자기를 낮추시고”라고 번역을 한다.

그 극치가 무엇인가? 십자가이다.  로마에는 다양한 사형 방법이 있었지만, 가장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은 십자가였다. 의복이라는 것이 당시에 가진 상징체계를 이해하시면, 벌거벗겨져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의 의미가 더 의미가 다가온다. 그것은 단순히 고통을 가하거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치와 치욕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형벌은 오로지 노예만 받게 되어있었다.

3절과 4절을 읽으면 이게 무슨 말인지 더 이해가 된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을,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원문을 보면 “내가 상대방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고, 상대방을 나의 상관으로 대하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이 말 한마디가, 읽는 사람들에게 충격이 되었을지 이해가 되세요? 이 말은 당시의 문화에 대항하는 말이다. 다들 올라가려 하지, 아무도 자발적으로 낮아지려 하지 않았다.

그럴 때 왜 바울은 이러한 말을 하는가?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웃으며 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명예와 지위는 중요한 것이다. 존경받으며 사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고, 사람들이 거기에 목을 멜 때, 대가를 치루기 마련이다.  자꾸 비교하게 되고, 경쟁하게 되고, 조금만 잘 되면 허영심이 생기고, 부풀려서 자랑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내려다 보게 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만 잘 되려고 하는 사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면 추구할 수록 점점 외로워지고 얼굴에 웃음 대신에 입꼬리가 내려가게 된다.

게다가, 그렇게 하면 할 수록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는 일을 하게 된다. 교회는 기관이나 조직이기 이전에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다. 2절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으샤으샤할 때는 교회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가요. 교회 안에서 서로 내가 높니 니가 높니 하고 경쟁할 때에는, 교회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다. 교회가 점점 흐지부지하게 된다.

여기에 있는 말씀은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내가 웃으며 살기 위해 필요한 말씀인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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