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xuality Q&A: 3. 동성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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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해 설교해야 하는 순간이다.

사실은 이 주제에 대해 별로 설교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수많은 오해와 다툼과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특정한 문제에 대해 설교하는 순간, 마치 그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무거운 죄인 것 같은 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Fuller 신학교의 Sherwood Lingenfelter라는 선교대학원 교수님이 계시다. 선교사였고, 그리고 학자로서 선교학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행정가로서도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학장을 거쳐서, 전체 대학원 학장까지 하셨다. 학생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런데, 그가 2002년에 딸 Jennifer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딸이 부모에게 Coming Out을 한다.  딸은 처음에 그것을 친구들에게 고백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예수 믿는 몇몇 결혼한 커플에게 고백할 때 그들이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이제 다시 용기를 더 내어서 부모님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가 특별히 충격을. 그러나 부모가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행동하여 딸을 잘 받아주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쓴 편지가 있다. 그는 딸을 사랑하고 감싸야 함을 안다. 또한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심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동성연애를 지지하는 신학적 견해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딸과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동성연애에 대한 논의들을 보면, 사랑이나 배려가 없이, 그냥 내가 논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라는 전제가 있는 듯한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다. 내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며 사랑과 배려의 관계에서 동성애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죄를 지은 여인에 대한 두 대조적 관점을 보게 된다.

1. 서기관과 율법학자들: 두 가지를 이야기 한다.

  • 간음은 죄이다.
  • 그녀는 죄인이니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하다는 관점

2. 본문에 등장하지 않지만, 숨어있는 그러나 중요한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로마이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을 인정했지만, 종교의 율법을 따라 사람을 사형하는 것은 금지하였다. 로마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고, 로마의 형 집행을 하는 것만이 유효했다.  무슨 뜻인가?

  • 이 여인의 성생활은 개인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당신의 성에 대한 종교적 가치는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해야지, 그것을 가지고 이 여인의 선택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것은, 종교의 개인화를 뜻하는 것이다.

3. 예수님의 딜레마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은 예수님을 딜레마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만약에 바리새인들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사람들로 그 여인을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여야 할 뿐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불량 시민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돌로 치지 말라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의 논리대로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4. 이 상황은 이 여인에게 더 큰 두려움과, 혼돈과, 상처를 준다.

이것을 오늘날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오늘날 동성애에 대해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 율법주의적 종교적 관점에서, 동성애는 죄이며, 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심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 세속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성적지향은 개인의 것이며, 따라서 존중되어야 하지, 그것을 종교가 판단할 수 없다. 혐오라는 돌을 던지지 말라.

그 사이에서 교회와 동성애자가 껴있게 된다.

리차드포스터는 자신의 글에서 이 상황을 잘 정리해 준다.

그들의 우측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신랄한 비난이 쏟아져 들어오며, 그들의 비난자들이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을 높이 사면서도 그네들의 거칠고 정확하지도 않는 바리새적인 어투의 공격에 감정이 상해왔다.  한편 좌측으로부터는 동성애를 열렬히 찬성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비난 받는 이들에 대하여 동정어린 관심을 가져줌에도 불구하고 후자는 그들에게서 보다 더 관대하게 적용되는 성경 해석의 방법에는 그만 아연실색하게 된다.

 

창조의 원리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동성애에 대해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접근하시는 지의 원칙과 방법론을 잘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성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 제일 먼저 창조로: 즉 인간의 죄가 있기 전에 하나님이 성을 디자인한 원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두 주 전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적인 문제에 대해 답할 때에도, 결국 그는 예수님과 같이 창조의 원리로 돌아가서 거기서 부터 성에 대한 가치관을 확립하는 것을 본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과, 5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서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너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마 19:4-5)

Cf) 레 18:22; 20:13, 롬 1:21-27, 고전 6:9 딤전 1:10

성이라는 것의 창조의 원리는 무엇인가? 특별히 성경에서 말하는 원죄가 있기 이전의 창조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한 것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더불어서, 기독교인의 성에 대한 논의는 창조적 논의이기 때문에, 문화적 한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를 총괄하는 논의이다.

* 그 내용은?

  • “남자와 여자“: 창세기 1장, 2장에 계속해서 남자와 여자의 1:1의 관계에 대해 나온다.
  • “한 몸“: 육체적인 연합 뿐 아니라, 전인적 연합이라는 것, 따라서 평생의 헌신된 언약적 관계를 뜻한다.

이 경계선을 잘 지킬 때 성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흘러들어온다.

  • 창세기 1장에서는 성은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 위에 충만하라.” 즉,  집단적인 관점에서 번식을 위한 것이 나온다.
  • 창세기 2장에서는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즉, 개인의 만족과 자기 완성을 위한 것

문제는 언제 생기는가?  하나님이 원래 디자인한 목적에 어긋나거나, 혹은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넘어가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간 것이다.

음식의 예를 들어 설명하자
음식을 통해 생명이 넘치도록. 그리고 즐기도록 하셨다.
불량식품이 무엇인가? 그 음식은 즐길 수는 있다. 그러나 생명을 헤하는 것이다. 음식이 주는 목적에 어긋난 것이다.
탐식이란 무엇인가? 음식 자체는 몸에 좋고, 또 즐거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탐식은 먹어야 하는 경계선을 넘어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죄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래의 디자인에서 벗어나게 될 때 대가를 치루게 되어있다.

동성애를 기독교에서 왜 죄라고 하는가?
하나님이 원래 성에 대해 디자인한 목적과 경계선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동산의 다른 실과는 다 먹어도 된다고 하셨다.하나만 먹지 말라고 하셨다.   경계선을 그은 것이다.
그러나 그 먹지 말아야 하는 과일을 보고 먹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것을 따먹고 말았다.
그 순간에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이것만 따먹으면 행복해 질 것이다. 그것을 우상이라 한다.
그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의 욕망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따라서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질 뿐 아니라, 신기하게도 사람끼리의 관계도 멀어졌다.

인간의 성적인 욕구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서,
나의 개인적 성적 만족을 위해,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목적과 경계선 밖으로 나갈 때에, 그것은 죄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 동성애에 대한 여러구절이 있다.
이 구절들을 보면, 창조의 원리로 돌아가 그것을 기준으로 지금 겪고 있는 현상에 대해 비평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게 된다.
각 구절이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때어서, 상황만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일관성을 깨는 해석으로 좋지 않다.

 

Neither Condemn, Nor Condone

Condemn은 정죄함이라는 뜻이다.
Condone은 아무일도 없는 척 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다 피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정죄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성을 창조의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하거나,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을 죄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정죄—즉 너희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지 않는다.

요3: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2.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이 정죄 받지 않으니, 가서 성을 자신이 원하는 데로 사용해도 된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고 하신다.
이전에 자신의 욕구대로 사용했다면, 이제는 그녀가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기를 원하신다

워싱턴 한인교회 김영봉 목사님이 이것을 잘 정리해 주신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이 말한다.

…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10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11 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많은 경우에 시험을 통과하는 기준처럼 사용되었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은 구원을 못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을 그렇게 사용하면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술 취하는 사람들은?”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사도바울이 말한다. 11절: “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 앞에서, 아무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죄를 죄라고 말해야 한다.
    • 그러나, 그것은 정죄함이 아니라, 죄에서 자유하여,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로 창조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하여주신다.

궁극적 여정의 동반자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마지막에 이 여인과 함게 남은 것은 어느 쪽도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었다.
모든 사람이 떠나가도 마지막까지 옆에 함께 있어주는 자가 되어주는 것이 교회가 해야할 일이다.

Richard Foster는 동성애에 대한 3가지 종류의 답을 정리한다

  • 실행: 그냥 동성애적 성적 지향을 그대로 사용하라.
  • 변화: 동성애적 성적 지향에서 이성애적 성적 지향으로 변화하라.
  • 통제: 자신의 동성애적 형태를 통제하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통제하며 독신으로 살 수 있다
  • 1. 실행에 대해서는 성경적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다.

    2. 변화에 대해서는 많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이 성적지향에 변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변화의 사례가 있다.
    텍사스의 The Village Church라는 곳에서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사역하는 Rick이라는 목사님의 간증을 들어보면 자기 자신도 어릴 때와 10대 때 동성애자였다. 그것 때문에 자살 시도를 두 번이나 했다.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분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알게 되었고, 그리고 자신의 성적 지향도 이성으로 변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실제로 결혼하여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더불어서, 자신이 사역하는 곳에서 같은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3. 통제에 관해서 Henry Nouwen의 예가 있다. 그는 공식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적 성향을 인정하거나 논의한 적이 없지만, 가까운 몇몇 사람이 그가 그러한 성향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통제가 아닌 2가지 선택이 가능했다. (1)자신의 서원을 포기하고, 실제로 동성애를 쫓아가는 것. (2) 공적으로는 사제의 삶을 살고, 사적으로는 동성애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둘 다 선택하지 않았다. 독신으로 살면서 사제로서의 삶을 살기로. 그리고 평생 그것을 지켰다.

    동성애는 아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류의 비성경적인 성적지향과 싸우고 있다. 또한 성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면, 또 다른 종류의 죄와 싸우고 있다. 사람들마다 자신이 취약한 죄의 부분이 있다. 완전히 변화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 그러한 죄의 성향에 대해 싸우며 살아가야 한다.

    지난 주에 “궁극적 여정"을 함께 가는 사람들에 대해 말했다. 상대방이 완벽하기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그의 삶에 나를 투자하고 동참하는 자. 그리고 상대방도 나의 인생 여정에 참여하라고 초대하는 자. 그것이 가정이고 교회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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