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

5가지 사랑의 언어: 2. 사랑은 “시-간-“이라 쓰지요

새해의 결의 Revisited

어느새 5월입니다.  한해의 1/3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시 연초로 돌아갑시다.  연초에 올해의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운동을 더 해야지.”
“금연을 해야지”

다른 말로 하면 작년보다 좀더 낳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연초의 결심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을 잘 지키고 계십니까?
거기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부족함을 느낍니까?

아직 올해의 2/3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질문을 조금 조정해 봅시다.
“단 하나의 결심만을 하고, 그것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 하나의 결심은 무엇이겠습니까?”

John Ortberg 목사님이 이 질문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질문에 “건강”이라 답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몸짱은 아마 삼손일 것입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건강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 꼭 행복한 삶은 아니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재정적으로 안정됨”을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어느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추수 때가 다가올 때, 그는 너무나 추수가 많아서, 우리 식으로 하면 너무 소득이 많아서, 그는 기존의 헛간을 헐어버리고, 더 큰 창고를 짖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게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문제가 생겼어요. 그날 밤 돌아가셨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많은 사람들이 직업적으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때에 가장 성공한 사람은 아마 헤롯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괴물과 같이 삽니다. 성공하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을 짖밟고, 죽였습니다.  거기에는 자기 뒤를 계승할 왕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자살 기도를 벌이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교육에 대해 목숨을 겁니다.  성경에서 가장 똑똑하고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은 솔로몬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1000명이나 맞이하게 됩니다.

이 모든 말씀을 드리고,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 같으며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며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한 해의 남은 결심,그리고 또한 우리의 나머지 여생을 살아가기 위해 내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결정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 첫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이 제자들과 의도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무엇이라 합니까?  바로 함께 하는 시간, quality time 입니다.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는 선물, 긍정의 언어, 섬김, 터치, 그리고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큰 도전인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바쁘다”가 키워드가 되어버린 시대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의 가정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이 무어십니까?  가정에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정 사역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다들 가족이 소중한 줄 압니다. 그러나 너무나 바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와 시간을 짧고 굵게 보내려 합니다.  즉, 자녀와의 시간을 양보다는 질로 승부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의 양도 질만큼이나 소중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무척 바쁜 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예수님 너무 바빠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적이 없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여리고로 가시던 도중에 예수님은 길가에서, 어느 구걸하던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부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소경을 향해 조용 하라고 그에게 호통을 칩니다. 예수님은 멈춰섭니다. 그를 불러 가까이 오게 하고,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시고, 그의 요청을 들으십니다.
여리고 성에 들어갈 때, 온 도시가 떠들석 하면서 군중들이 길에서 환호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자신을 보고 싶은데, 키가 작아서 보지 못하고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봅니다.  예수님은 뽕나무 밑에서 멈추고, 삭개오에게 말을 거시고 그의 집에 들어갑니다.   그의 아내, 그 부모,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아마 밤 늦게까지 삭개오와 대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물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과 깊은 대화를 합니다. 그 여인은 이방인이요, 동네에서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와의 대화는 복음서에서 기록된 대화 중에 가장 긴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함께 하는 시간의 대가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시간을 투자한 것은 제자들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때로는 밥 먹을 겨를 조차 없을 정도로 바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로는 그 와중에도 제자들을 위해 시간을 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걷고, 때로는 시간을 내어 따로 한적한 곳에 가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이 한번도 “왜 저희들에게 시간을 안 내주십니까?”라고 항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 시간이 소중합니다.

정태기 박사님.  기독교 상담과 내적치유의 권위자입니다.  그분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려면 3이라는 숫자가 중요하다는 거에요.  수련회를 보통 몇일 갑니까?  3일 입니다. 그 정도 해야 온전히 주님을 만나고 변하게 됩니다.  제자 훈련을 해보면 좋은 습관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3주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몇 년을 보내셨습니까? 3년 입니다.  집중하여 3년을 그들과 함께 보낼 때 그 제자들이 변하고, 성장하고, 교회를 세우고 또한 이끌어나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이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함께 하는 시간”의 힘입니다.

Being Fully Present

함께 하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함께함의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온전히 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아내와 식사하러 나갔는데 바빴나봐요. 스마트 폰으로 이메일 체크하고 있는데 문자가 하나 오더래요.  문자의 내용이 “여보, 나는 당신 앞에 앉아 있어요.”였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와 함께 있을 때에는 이 세상에 오로지 그 사람만 있는 것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있을 뿐 아니라, 마음이 나뉘지 않은 거에요. Undivided heart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면 함께 하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채프만이 자신의 책에서 두 가지를 말합니다.  듣기와 말하기입니다.

듣기

어떤 학자가 통계를 내보니: 커큐니케이션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가 보니까 65%를 듣는데 사용하더랍니다.  나머지 20%가 말하기, 9%가 읽기, 그리고  6% 글쓰기였습니다.  무엇을 잘 해야 하겠습니까? 듣기입니다.  우리 교육의 맹점이 무엇입니까?  말하고, 쓰고, 읽기에 대해서는 치는데, 듣는 것에 대해 가르치지 않습니다.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듣는 것을 수동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James Hunter가 자신의 책 서번트 리더십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네 배 빨리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들으면서 속에서 많은 생각이 오고 갑니다.  그 내면의 대화를 잠재우고 조용히 경청해야 합니다.  또한, 들으면서 선택적으로 듣고, 말하는 것에 대해 판단하고, 대화의 결론을 자기에게 좋게 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과 공감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보는 것을 보고, 상대방이 느끼는 것을 같이 느껴야 하고,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말하기

그렇다면 듣기만 하면 됩니까?  말을 해야 합니다.  채프만의 책에 “사해와 같은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사해가 무엇입니까? 들어가기는 하는데, 나오지를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말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서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같이 있으면 한 사람은 계속 조잘조잘 말하고, 다른 사람은 그걸 다 들어주면 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좋지만, 나중에는 그게 답답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가?  결혼하고 이렇게 말하더래요. “5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사해와 같은 사람은 말을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사해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단순히 말수가 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건과 그것에 대한 내 생각과 평가뿐 아니라, 그 일에서 느낀 감정을 표현해야 합니다.

운전을 하는데 차가 바짝 따라옵니다.  그건 사건입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느낍니까?  “분노”를 느낍니다.  무엇이라 말해야 합니까? “운전을 저렇게 하면 되나?  왜 저따위로 운전하는 거야?”라고 말하면 됩니까?  아니에요.  “차가 바짝 따라와서, 나는 분노를 느꼈다.”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자녀가 숙제를 안했습니다.  그리고는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합시다.  “숙제를 안한 것, 그리고 거짓말을 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생각을 말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내 마음이 상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해인 분들, 대체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평생 이렇게 살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어색해서 내 마음을 잘 못 드러내겠어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의 원리를 기억하십시오.  내 사랑의 언어가 아닌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가 “함께 하는 시간”이라면, 이것을 말해 줘야 그의 감정의 탱크가 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셨습니다. 그 분은 웃으시기고 하고, 화도 내시고,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살리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리와 통합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감정을 말하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한 내가 십자가에 죽고,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직 상대방만 있는 것처럼, 그의 말을 경청하고, 지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온전히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또 우리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친구 중 하나가 영국에서 유학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유명한 존 스토트 목사님의 교회를 방문합니다.  영국의 다른 교회들이 점점 비어갈 때 그 분의 교회만은 젊은이들이 계속 찾아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의 친구가 발견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목사님이 문 앞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씩 대화를 합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목사님과 대화하려고 기다립니다.  그러면서 이 분은 참된 목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도 가서 집에서 가족과 함께 그와 같이 하십시오.  집에 갈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개인적이고 친밀감 있는 대화를 할 때, 그 시간이 변화의 시간이고, 생명의 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 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선택하고, 서로와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 또한 영원한 생명의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