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5일 성탄예배
대강절
빛을 따르는 자
대강절: 3. 생명의 빵

선교사 예수: 소망의 시작
Brokenness
아마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2004년에 인도양에서 쓰나미가 일어났습니다.
- 23만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 특별히 그 지진의 진앙에서 가까웠던,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에서 17만명 정도가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이 사진은 바로 아체 지역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보시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리고 나서 다음 사진을 봅니다.
아이를 잃은 사람이, 다시 아이를 얻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미국의 Duke University의 인구학과 사회학 교수인 Elizabeth Frankenberg. 그는 쓰나미 직후에 아체 지역에 들어가서 출산률의 변화에 대해 연구했어요. 결과는 쓰나미로 인해 자기 자식을 잃은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37%나 출산을 많이 했다다고 합니다. 프랑켄버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내어놓는다. 가족과 인구를 재건하는 것 뿐 아니라, 집과 생계를 다시 세우고, 그 지역을 세우는 것도 있었다. 출산률이라는 테마일 뿐 아니라, 회복이라는 테마도 있는거에요.
희망 & 소망
희망에 대해 생각해 봐요. 이 아이가 팔을 뻗는 것이 마치 “파괴와 사망에 대해 승리했다”라고 외치는 듯해요. 어떤 면에서 맹랑한 듯해요. 아직 갈 길이 먼데? 그러나 회복과 재건이라는 소망이 있을 때, 그 완성을 바라보며, 그것을 향하여 사는 것이 바로 승리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희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일을 이루거나 얻고자 기대하고 바람 혹은 좋은 일을 기대하는 마음. 바람입니다.
그 희망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특별히 어려운 시간을 보낼 때는 귀하지요.
소망
그러면서, 또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망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중요한 것이 있어요. 희망과 소망의 차이를 알아야 해요.
- 희망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 얻고자 하는 것. 나에게서 나오는 것.
- 소망은 하나님이 이루시겠다고 정하신 것.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
희망은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루겠다고 정하시고, 말씀하시고,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바라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 종말의 말씀을 주실 때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회복의 시작점인 것입니다.
본문은 유대가 당시의 초강대국인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온 나라가 폐허가 된 때에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회복의 메시지를 말씀하신다. 육체의 장애를 회복하실 거에요. 그리고 광야와 사막을 바꿔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곳이 되게 하실 거에요.
그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탄 장미
성탄이 다가 오면,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성도들이 성탄 트리에 꽃을 꼽아 장식했다고 합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꽃이 시드니까 대신 트리에 빨간 리본을 대신 달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나님이 광야와 같은 내 삶에서 꽃을 피게 할 것이라는 소망의 고백인 것입니다.
종말로서의 성육신
여기에 성탄절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어요. 다른 말로 그 약속을 종말에 성취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오늘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되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화 됩니다.
사35:5-6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6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눅 7:22 예수께서 그들에게[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인 것을 묻는 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복음서에서의 기적은 예수님은 단순히 와서 능력을 행해서 병든 자를 고치고 장애를 회복시킨 것이 아닌 거에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 이제는 성취되기 시작한 거에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바로 자신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마찬가지로 2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장래에 볼 것을 말합니다.
사35:2 …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의 영광을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오늘 본문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신약에 와서는 그 종말이 누구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거에요? 바로 예수로 부터. 예수가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종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복과 재창조의 역사,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직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취되기 시작했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가 이것을 D-Day와 V-Day로 설명해요. 2차 대전 때 연합군이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작전을 합니다. 그 날이 바로 D-Day입니다. D-Day는 승리가 시작되기 시작한 날입니다. 완전한 승리는 독일군이 항복한 날, 바로 V-Day에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승리를 소유하고, 그것이 완성될 것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싸움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소망 재정의
소망을 재 정의해야 합니다. 앞에서 소망은 하나님이 장래에 이루시겠다고 주신 약속을 믿고 그 성취를 기다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수정해야 합니다. 소망은 하나님이 장래에 이루시겠다고 주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면서 이미 성취되기 시작했음을 확인하고, 그것이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다리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소망은 단순히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현재 이미 시작되었고, 미래에 완성될 것이라는 것이에요.
인내
그러므로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주저앉지 마세요.
사35:3 너희는 맥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히12:12-13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우리 중에 이 말씀이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서는 자꾸 우리의 과거의 살아온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label를 달아요. 그럴 경우에는 소수의 잘 나가는 사람을 빼놓고는 다 안좋은 label만 달려요
- 진학하는데 떨어진 학생이야
- 저 사람은 사업에 실패했어
- 그는 결혼에 실패한 사람이야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것은 과거가 나를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의 약속이 나를 빚어가는 삶인 것이에요. 다른 말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시작하셨고, 마지막에 완성하실 그 것이 나의 최종 label인 것이에요.
-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이고,
-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이며,
- 왕과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을 다스리는 자인것이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일어나세요. 이것을 기억하세요.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 생명의 역사, 재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면오늘날에 있어서는 얼마나 그 회복과 생명과 재창조가 더 풍성하겠어요
적용 2: 교회의 선교
그러므로 또한 나가서 시작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를 말과 행동으로 전하세요.
행3:6-9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7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8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사야의 내용이 이루어진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한 하나님의 회복-재창조의 역사가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성도를 통해서 이 땅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에요.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참된 회개가 있고, 말씀과 성령에 이끌려가는 역사가 있어야 해요. 깨어진 가정이 회복되고, 절망하는 젊은이들이 꿈을 가지게 되고, 무너진 기업이 일어나고, 병든 자가 치유되고, 사단의 권세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육신: 하나님의 고난
이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이제 여러분을 스스로를 제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부유하신 하나님이 가난해 지시고
- 전지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는 “그 나라가 언제 올지는 아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라고 말하시는 분이 되신다. 전지를 제한하신 분이시며
-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이 피곤해서 배를 타고 주무시는 분이 되심은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고난의 극치가 십자가입니다. 생명 그 자체이시며,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유지하시는 분이, 십자가에서 생명 없음—죽음—을 맞이하세요..
그러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재 창조의 역사를 누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두 나무 이야기
계시록 22:1-5
기독교의 시간관은 직선적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천지를 마감하실 때가 있다.
요한복음 22장은 성경의 마지막 장이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오늘 마지막 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종말의 관점이다. 종말이라는 것은 미래 완성이다. 장래의 일을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 그리고 온 역사를 그것을 향해 이끌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 오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된다.
성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성탄을 과거적 사건으로 본다. 2000년전에 예루살렘 북쪽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난 사건이다. 성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 일을 통해 인류 전체의 역사–그리고 나의 삶이 변화되어 새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족짜리 시각이다. 예수님 과거에 오셨을 뿐 아니라, 미래에도 오실 것이다. 재림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은 과거의 사건 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일이기도 해요.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가 있다. 재림. 마지막. 미래의 완성이 어떻게 되는 지를 보여줘요. 그리고 그 미래의 완성을 향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주례를 몇 번 부탁 받았다. 웨딩드레스를 생각해본다. 결혼하는 신부는 그 옷을 입고 입장할 때를 생각하면서 오늘부터 자신을 가꿔요. 다른 말로 살을 빼요. 결론을 알고, 때로는 그 결론에 이끌리어, 때로는 그 결론을 향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시작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그리고 마침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인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그 두개를 기준으로 나를 볼 때,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를 보여
그럼 그 시작과 결론의 모습이 무엇인가? 생명나무에 대해 말해보자. 앞에 성탄 트리가 있다. 장식이 달려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나무를 상징한다. 생명나무는 시작과 끝에 다 나오는 것이다.
성탄의 과거적 의미: 원죄-심판-사랑
생명나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한 선악과를 알아야 한다. 이 나무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선악과의 나무 열매를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가 그 말씀을 어기고 그 열매를 따먹고 말았다. 그것을 우리는 원죄라고 한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3:5-6)
성 어거스틴은 원죄를 두가지로 설명한다: 탐욕, 교만
- 탐욕: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여서, 따먹으면 안되는 것을 먹었다
- 교만: 하나님과 같아지기 원해서 또한 그것을 먹는다.
탐욕: 필요이상으로 더 많이 가지고 싶은 마음이다.
먹을 것을 가지고 생각해 봅니다. 먹을 만큼 먹고 말아야지. 맛있다고, 더 먹고 싶다고 욕심을 부려서 더 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걸 탐식이라 해요. 수도사들을 생각해봐요. 이 사람들 한주에 한번 혹은 두번 정도 정기적으로 금식했어요. 요한 웨슬리도 한주에 이틀 정도 금식했데요. 한 노 수도사는 “하루 한 끼 식사하면 수도승이다. 하루 두 끼 식사하면 육적인 인간이다. 하루 세 끼 식사하면 짐승이다”고 말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만족을 모르는 위장을 다스려야 한다.” 왜 다스려야 해요? 탐식에 사로잡히면 결국에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질문합니다. 탐식으로 죽으면 자살이에요? 타살이에요? 연말이에요. 모임이 많아요.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탐욕도 마찬가지이다. 물질은 필요하다. 그러나 “만족을 모르는 내 주머니를 다스리지 못하면, 내 영혼이 병에 걸려 죽고 말게 되요.” 구체적으로 두 가지 병에 걸리게 된다.
-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 탐욕은 차가운 죄: 탐욕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 “I don’t care.” “내 일이 아니다.”
-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서 기쁨을 누린 것이 언제입니까? 그 기억이 나지 안는다면 당신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 더불어서 탐욕은 탕진으로 연결된다.
- 탐욕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재물을 허비해요
교만: 필요 이상으로 더 높아지고 싶은 마음.
지위도 필요하고, 명예가 필요하다. 문제는 필요 이상으로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 끝이 어디일까? 하나님보다 높아지고 싶다. 종속되지 않으려는 마음이니까. 결코 만족이 없는 것이다.
요한 크리스소솜: “공허한 명예욕”이라고 불러요. “불안, 비굴함, 질투, 불화, 중상, 고소[비난], 거짓말[부정직], 겉치례, … 칭찬을 열망, 명예의 갈망, .. 가난한 자들의 경멸, 부자들을 섬김..”등으로 증상을 말한다. 교만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자리를 사수하려고 악을 행하게 되요. 아첨, 야비하고, 천한 방법을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낭비한다.
선악과의 메시지: 동산 중앙에 왜 선악과를 만드셨나? 우리로 탐욕과 교만은 절대로 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먹는 순간 그 옆에 있는 생명을 잃어버린다
그러면서 생명나무에 대해 생각해 봐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이 생명 나무에 대해 말씀이다.
창3:22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1) 심판의 메시지
- 죄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알아야 한다.
- 죄로 인해 더이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 사실은 스스로 먹지 못하게 한 것이에요.
-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 그 교만과 탐욕이 있으면, 하나님이 불편해진다. 그리고 나를 해치고, 이웃을 해치고, 피조물을 훼손하게 된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 심판하시는 거에요.
(2) 심판 속에 숨어있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 성탄의 메시지는 죄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역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 그 예수가 생명나무이다. 앞에 있는 나무가 바로 그 예수이다. 그가 오신 것은 세상을 병든 나의 몸과 영혼을 치료하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려고 하심이다.
마 20:28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 교만에 대해: 우리가 한없이 높아지려고 할 때,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어 찾아오신다. 섬길
- 탐욕에 대해: 탐욕으로 가득찬 우리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시려고 이곳에 찾아오신다.
앞에 있는 나무: 생명나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십자가: 그와 동시에 이 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게 참된 생명의 나무 되신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셨다.
- 사실은 우리가 마른 나무이지만,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라는 매마른 나무에 달리셧다.
- 그러함으로 우리의 삶을 치료하세요
- 우리가 그 생명나무에서 나오는 풍성한 열매를 먹고 생명을 얻게 된다
회개
그러므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 예수가 우리에게 오셨으니, 우리도 예수께로 나가자. 그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그리고 입술로 예수는 나의 구세주이고, 예수는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이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제는 내가 살게 해 주셨다.
기독교의 전통을 보면, 원래는 대강절 기간은 참회의 기간이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먼저 참회로 나아가자. 예수의 보혈로 자신을 정결케 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다. 예수가 나를 찾아오는 시간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신비로운 시간
그분 앞에서, 수치심 가운데 신비하게 나에게 흰옷을 입혀주시는 은혜
그 두려움 가운데 참된 평화를 주시는 은혜
그 통회함 가운데 참된 기쁨을 주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럴 때, 또한 우리 삶에 변화의 열매를 맺게 된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한다.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4)
육체라는 것은 영혼과 대립되는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상관없이 정욕과 욕망으로 대변되는 죄에 이끌리어 사는 나를 뜻한다.
- 예수를 믿음으로 죄된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 이제는 예수가 내 안에서 사시고, 예수의 성품이 내 안에서 열매처럼 자라나게 된다.
- 더불어서 그럴 때 또한 나는 세상을 치료하고, 또한 세상에 생명을 전하는 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