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사도신경 5.고난과 십자가

사도행전 16: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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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테마이다.

이번 주에는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화해”라 할 수 있다.

  •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신다.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다.
  • 그리고 하나 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화목을 전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게 하시고, 그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게 하신다.

오늘은 화해의 삶에 대해 초점을 맞추자.

Why 화해?

왜 화해해야 하는가?  사실은 화해라는 것 쉽지도 않고,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많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한다.

화해를 내가 왜 합니까?

그 질문에 대해 반문한다.

화해를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C S Lewis가 쓴  The Great Divide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이 천국에서 지옥에 방문한다.  그런데 지옥에는 깜짝 놀랍게도 좋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텅 빈 집들이었다.  옆에 사람이 설명해준다.  지옥에서  이사하면 그날로 이웃과 크게 다툼이 일어나고 그래서  이사를 나간다.  그러나 이사를 간  그날로 이웃과 또 싸운다. 그래서 점점 밖으로 나가고 고립되어 버린다.

누군가가 나폴레옹을 보고 와서 말해준다.  나폴레옹은 제국 형식의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이 혼자산다.  1년 내내 멈추지 않고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그건 Soult의 잘못이고, 그건 Ney의 잘못이고, 그건 Josephine의 잘못이고, 그건 러시아 사람의 잘못이고, 그건 영국 사람들 잘못이고”  하루 종일 남의 탓만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큰 집에 살면 뭐하나?  옆에서 버티지 못하고 다 도망가는데?”

이 이야기는 지옥이라는 것에 새로운 파라다임을 제공한다.  질문한다.

지옥 가는 것인가? 지옥을 만드는 것인가?

지옥은 화해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이와 정 반대의 예가 성경에 나온다.  바로  바울의 예이다.  오늘 이야기에 한 간수가 등장한다.  바울에게는 그는 그날 낮에 자기를 몽둥이로 매질한 사람이다.  그가 자기를 감옥에 가두고 쇠고랑 채웠다.  바울 입장에서는 용서하기 힘든 간수이다.  그가 곤경에 빠졌다 판단해서 자결하려 할 때 바울이 뭐라고 말하는가?  “쌤통이다.  나를 괴롭히더니 천벌을 받았다. ”  라고 하는가? 아니다 .

28절.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바울은 그 사람을 용서하고 도와준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성경에 아름다운 장면이 나온다.  그가 바울을 물로 씻기고, 바울을 자기 집에 대려다 가족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   이걸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이 34절 끝에 “온 가족과 함께 기쁨”이라는 단어가나온다.  낯선 곳에서 가족이 생겼고, 그 가족과 더불어 기뻐했다.  다른 말로 그걸 “천국”이라 한다.

잠17:9 허물을 덮어 주면 사랑을 받고, 허물을 거듭 말하면 친구를 갈라놓는다.

화해하는 것, 그러기 위해 용서를 구하기도 힘들고 역으로 용서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기억하라.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가족으로 삼으셨다.  화해를 소유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한 자이다.
  • 불신: 그 하나님의 화해를 거절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화해가 없는 자는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자이다.

화해는 단순하다 않다. 그러나 화해라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많은 성취에서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신경 4.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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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처녀가 임신을 합니까?”400066-1

사도신경: 예수에 대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구절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그건 과학적이지 않지 않으며, 옛날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믿은 것이지, 현대인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성경도 기독교 신앙도 권위를 가질 수 없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셉도 현대인들처럼 마리아의 임신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것에대한 요셉의 반응은 무엇인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마태복음 1:19; 새번역)

2000년전 사람이지만, 요셉도 처녀는 혼자 임신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가복음에도 마리아 버전의 예수의 잉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서 말한다. “너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때 마리아가 질문한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34)

마리아도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 것을 알았다.  더 나아가 그것을 성경으로 기록한 마태와 누가도 알았다. 특별히 누가는 의사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마태와 누가는 독자들이 자연적으로는 “처녀는 혼자 임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쓴 것이다.

팀 켈러 목사님이 이렇게 말한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다.  ‘많은 경우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충분히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젊어서 대학때 신앙에 대해 알고 고민했다.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고민했고, 많은 책을 읽고 탐구했다.  그리고 신앙이, 특별히 개혁신학이, 옳다고 결론을 내리고 신앙을 선택한다.

마리아 임신의 도전

그럴 때 예수의 처녀 잉태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있다.   복음서는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흥미를 제공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들이 아니다.  복음서의 목적은 사람들로 그것을 진지하게 믿고 믿음대로 살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에 이 마태와 누가가 진지하게 이 사건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기록했다면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빠진다.  더 이상 어정쩡하게 있기가 힘들어진다.

  • 마태복음 1장을 읽다가 피식 웃고 성경을 덮어버리던지
  • 아니면 이 이야기의 진지하게 받아들이던지.

 다른 말로

  • 하나님이 이 땅에서 역사할리가 없으니, 예수는 마리아가 바람피고 난 아이라는 믿음을 가지든지 (내가 “믿음”이라는 말을 쓴 것을 유의하라)
  •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라 믿어야 하는 것이다.
    • 마리아에게서 낳으니 100% 사람이고,
    •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니 100% 하나님의 아들이며,
    • 따라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임을 믿어야 한다.

사도신경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2016년 3월 6일 권혁수 목사 설교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절실한 3가지에 대해 답을 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된다.

최고의 예언자

첫째는: 예수는 삶의 궁극적 질문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다.

영어로 I wasn’t ready for this 라는 표현이 있다.  의역을 해보면 “나는 이런 일을 겪을 줄은 몰랐습니다.”  살다보면 벼라별 일을 다 겪는다.  이 일을 왜 당하는지 설명이 필요하고, 이 일의 원인을 알고 싶어하고, 이 일의 결론은 어떻게 될지 불안하고, 이 일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걸 다른 말로 해 보자.

  •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시작과 끝은 무엇입니까? (기원과 종말)
  •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의미)
  • 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윤리)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고 고백한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인생의 질문에 대해 속 시원하게 답해주셨다.

산상수훈의 처음 두 구절을 생각해 본다.

마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해 져본적 있는가?  모르긴 몰라도, 여러 번 넘어지고, 뒹굴고, 그래서 체면도 구겼을 것이다.  그 일을 겪은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행복하다”라는 뜻이다.  바닥을 친 사람을 행복을 주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마5: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큰 일을 당해서, 혹은 소중한 것을 상실해서 애통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그를 위로하고, 오히려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신다.

예수가 누구이신가?  그는 교사이다.  구약의 표현대로는 예언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분이다.  이 세상을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신다. 다른 말로 우리에게 진리를 계시하여 주신다.  특별히 아무 교사가 아니라 최고이며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분이시다.

영원한 왕

두번째로 예수는 악의 문제에 대해 답을 했기 때문이다.  악한 영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명하여 쫓으시는 예수님을 본다.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는 것인가?    모든 것이 중립적인가?  아니다. 악이 존재한다.   귀신 들렸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 악이 불법을 행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더 나가서 악이 흉흉하고, 악이 지배하는 뜻한다.

예수님은 그 악을 명하여 제어하고 악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다.

눅 4:36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서로 말하였다. “이 말이 대체 무엇이냐? 그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1악한 귀신들에게 명하니, 그들이 떠나가는구나.

예수님은 악을 다스리는 권위가 있고, 악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것은 통치적 개념이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왕이시다. 그는 왕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악을 심판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우리를 악에서 자유하게 하신다.

유일한 제사장

세번째로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치료자이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다.

생로병사라는 말이 생각한다.  태어났다. 생명을 가졌어요.  그러나, 나이들고, 병들고, 결국에는 죽을것이다.  병이라는 게 무엇인가?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부터는 종합검진 받으러 가는게 두렵다.  뭔가 찜찜한게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병은 죽음을 상징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니, 장모가 일어나서 예수님께 시중들었다.  왜?  “나를 살려줬으니까.”

성경에서 죽음의 원인을 죄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 것은 그가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예수님은 제사장이시다.  특별히 그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참된 제사장인 것이다.  그가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리스도

이 3가지: 예수님은 예언자요, 왕이시고, 제사장이시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3중직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라는 말은 기름부은 자라는 뜻이다.  전자는 그리스어고, 다른 하나는 히브리어이다.  하나님이 이 3가지 직분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시고, 성령을 주셔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위와 권세를 부여해 주셨다.

 

사도신경 2.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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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8 주일예배

사무엘상 16:1-13

본문은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는 장면이다.

한 집안의 막내(가장 작은 자)요, 양을 치는 목동이 한 나라의 왕이 되는 첫 걸음이다.  그의 내면과 외적인 면이 하나님으로 인해 새롭게 되고, 변화되기 시작하는 첫 걸음이다.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초월성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나온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한 나라의 왕을 폐한다.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서 방자할 때, 그를 왕에서 패하신다.  그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다. (1절)

전지하신 하나님:

7절. “…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겉모습: “눈에 보이는 대로”라는 뜻이다.  중심이라는 것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의 생각. 양심. 도덕성. 취양이다.  사무엘은 그 나라의 영적-정치적 지도자이다. ‘사람을 꿰뚤어 보는 듯한 눈빛’의 소유자가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그도 이새의 아들들의 진정한 믿음과, 성품과, 능력을 보지 못한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 8명을 다 아시고 (믿음, 인격, 능력, 어디에 사는 지)  사실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다 아시고, 그 중에서 다윗을 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내재성

그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제 다윗을 찾아오신다.  사무엘이 다위을 데려오라고 그 아버지에게 제촉한다.

  • 11절. “어서 사람을 보내어 데려오시오. 그가 이 곳에 오기 전에는 제물을 바치지 않겠소.”  … 12절 “바로 이 사람이다.  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알 뿐 아니라, 나를 아신다.  그 하나님이 나를 아실 뿐 아니라, 나를 선택하셨다.  나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기름을 부으신다.  그리고 나를 다스리는 자, 나의 존엄성을 회복시켜주신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나의 하나님” 되신다.ㄴ

하나님이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순간부터, 다윗의 내면이 변하고, 다윗의 인생이 변한다.

하나님의 변하시 않는 신실한 사랑

11절에서 사무엘이 이새에게 “아들들이 다 온 겁니까?” 하고 물으니, 이새가 대답하였다. “막내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 양 떼를 치러 나가고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그 나라의 최정상의 종교-정치적 지돠가 자기 집에 와서 아들 중 하나에게 기름을 붙겠다고 하는데, 아들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있는가?

다윗: 이새가 감추고 보여주지 않은 아들이다.  무슨 일인지 사연은 나오지 않지만, 무언가 다윗은 그 집에서 천덕꾸러기였다.  실제로 17장에서도, 전쟁에 나간 형들에게 아버지가 보급품을 가져다 주라고 다윗을 보낸다. 그 때 엘리압은 친절한 말 한마디 않고, 양을 내버려 두고 전쟁 구경이나 하러 왔다고, 다윗에게 꾸지람을 한다.  다윗은 집안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다윗: “사랑받는 자 / darling”이라는 듯. 그러나 부모에게서 사랑받지 못햇다.  다윗의 친 아버지는 아직 10대 소년인 다윗을 곰과 사자가 있는 위험한 들판으로 내보내서 양치게 했지, 안전한 집에 데리고 있지 않았다.  집에 귀한 손님, 사무엘이 찾아와서, 온 가족이 모여 잔치를 벌리지만, 다윗은 여전히 들판에서 양을 쳐야 했어요. (명절도 아닌데, 그래야 했어요.)  사무엘이 직접 그들을 성결케 했어요. 그러나 다윗은 그 영광을 받지 못하고, 양들 사이에서 부정하게 잇었어야 했다.  다윗을 “막내”라고 할 때 그 단어는 “가장 작은 자”라고 해석이 된다. 정말 작은 자라로 취급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윗은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여성의 문제가 복잡했다. 부모에게서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그의 내면에는 늘 사랑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권력의 자리에 가게 되고 카리스마가 있는 리더가 되었을 때, 복잡한 여자 관계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한 여인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관계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언약을 맺으셨다.  부모도 그를 성결하게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성령을 주셔서 참된 거룩함을 주신다.  다윗의 평생동안 하나님이 다윗을 져버리지 않고 사랑하신다.  다윗에게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적이었다.

시편 27:10: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시편 27편은 그 상황이 전쟁터이다. 그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다윗은 안전한 곳에 대한 갈구가 있었을 것이다. 군대 가면 제일 보고 싶은 것은 엄마이다.  제일 가고 싶은 곳은 부모님 집이다.

다윗은 “주님의 집”에 가고 싶어요.   하나님을 정말로 아버지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집에 다윗을 맞아들이고,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10절에서 다윗은 말한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나를 영원히 사랑하시고, 나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