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선택: 2. 부족함을 선택한 사람들

저희 아버지 고향이 시골이다.  어릴 때 아버지 따라 시골에 가면, 온 동네 사람들이 서로 가족처럼 잘 알았다.  오랜만에 봐도 그냥 안 보내고 집으로 들어 오라 해서, 밥 한술 먹여서 보내며 서로 안부를 묻는다.  그걸 인지상정이라 하지 않는가?

룻기 1장 끝부분에 나오미라는 여인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나온다.  나오미가 돌아올 때 온 동네가 떠들석하게 그녀를 맞이한다.  그 때 그녀가 말한다.

“나를 나오미라고, 즉 기쁨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 즉 괴로움이라고 부르십시오.”

나오미는 자신의 인생이 쓰디 쓰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셨다고 말하는 나오미의 씁쓸함이 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감춰진 씁슬함이 있다.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 부르는 순간부터, 그렇게 환영하던 동네 사람들이 다 침묵해 버린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온 것은 “주님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룻 1:6) 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 그녀는 추수 때에 돌아와서 사람들의 창고가 가득차고 일자리도 많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 속에서도 아무도 과부인 나오미와 룻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거나, 혹은 그들에게 번번한 일자리라도 마련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애써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다.

어느 신학교 교수님이 해 주신 이야기가 있다.  그 분이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 대학의 교수님과 사모님을 만나 대화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분들이 자기 학교 학생들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 교수님 내외분들이 학생들과 함께 어려운 이웃을 돕자고 했더니, 그 중에 학생 하나가 발언한다.

“내가 왜 다른 사람과 나누고 도와야 하지요?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수고했는지 아세요?”

사실은 우리가 말은 안 하지만, 그게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일 때가 많지 않은가?  그 태도로 인해 사실은 지금 온 나라가 아프고 있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불편한 진실을 애써서 모른척 할 때, 그가 이들을 돌본다.  그는 아무도 이름도 알려 안하는 “모압 여인 룻”에게 말한다.

“댁이 한 일은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그리고 그 말을 이루기 위해 룻을 보호하고 룻에게 이삭을 마음껏 줏게 해준다.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보아스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다.

2015년 4월 12일 주일 권혁수 목사 설교
룻 1:19-2:20

선택: 1. 절망을 선택한 자

고통과 절망의 차이를 아는가?  고통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 중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회복의 가능성이 있고, 아직 희망이 있다.  절망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 소망이 끊겨버린 것이다.
절망에 빠진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할 때 의도했던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살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연구한 것에 대해 접해본 적이 있다.  생명이 소중합니다.  왜 자살하는가?  경제학자들이 그것을 경제적 논리로 설명한다.  절망의 상황에서, 살아있는 것과 죽는 것을 비교해 볼 때, 죽는 것이 더 낳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본문에서 두 가지 차원의 절망을 말한다.  첫째는 모든 것을 상실하는 절망이다.  남편과 아들이 죽었다.  과부가 된 자신은 이제 가진 것이 없어서 자기 며느리들을 책임질 수도 없고, 나이가 들어서 일할 수도 없다.

두번째는 그 절망적 상황으로 인한 2차적 상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떠나간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내보낸다.  자신과 함께 가겠다는 울면서 사정하는 며느리에게, 간곡히 부탁해서 그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며느리 중 하나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결국 시어머니를 떠나간다.  그것을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는가?

삼일을 굶으면 어떻게 될까?  요새 젊은 아가씨들은 “날씬해져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옛말에 먹을 것이 없어 삼일을 굶으면 정승도 도적질을 한다고 하였다.  왜 도둑질을 합니까? 그것이 나쁜 것을 모르는가?  절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부모들이 아이들을 유기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렇게 되는가? 무언가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왜 이혼을 합니까?  그 좌절된 심정을 이해하는가?
왜 살인을 하는가?  그만큼 강한 압박을 느끼기 때문이다.
절망은 우리로 마땅히 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해서는 안될 일을 하게 한다

이 모든 말을 다 한 후에 룻이라는 한 사람의 선택에 깜짝 놀라게 된다. 룻이 나오미를 선택한다. 그것은 경제적 논리를 이기는 고백이다.

1: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1:17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도”
“어머님 계신곳에 나도 있고”
“어머님 겨래, 내 겨래”
“어머님 하나님, 내 하나님”

이 말은 평범한 상황에서는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왜 그리 감동이 되는가?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정상적 삶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룻의 선택과 고백이 얼마나 용기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랑의 고백이다.  죽음을 이기는 고백이다.  그 고백이 사람을 살린다.  그 의지적 선택이 한 사람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둘이 한 공동체의 지체가 될 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