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가지 사랑의 언어

5가지 사랑의 언어: 5. 섬김

꿈들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이라는 질문을 던질 때, 아이들이 예상과 다르게 너무나 대답을 잘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걸 영상으로 만들었습니다.   함께 보도록 합시다.

아이들이 참 대답을 잘 한다.  “하나님이랑 나는 무슨 사이인가요?” 이라 물어볼 때, 아이들은

  • 매일 함께 하는 사이: 같이 노는 사이
  • 구원해주는 사이: 총 안맞게 해 주는 사이
  • 사랑하는 사이
  • 도와주는 사이: 기도할 때 “말을 들어주시는 사이”
  • 뚱뚱한: 힘을 나눠주는 사이
  • 재미있는 사이

가만히 아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들이 다섯가지 사랑의 언어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나를 사랑하세요.
  •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도 나를 사랑해요.
  • 그리고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해요

오늘 본문에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청해서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식사를 대접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구를 집으로 초대해서 대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초대하고도 그것을 즐기지도 못하고, 칭찬을 듣지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에 손님을 초대하면 해야할 세 가지 예절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손님이 오면 그를 환영할 때,그에게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들이 나와 같은 지위의 사람이라면 그들의 볼에다 입맞춤을 했어요.  나보다 높은 존경할만한 분이라면, 그들의 손에다 입맞춤을 했습니다.  시몬은 그러지 않습니다.

식사하기 전에 손님의 손과 발을 물로 닦아주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귀한 손님이라면 직접 그들의 발을 닦아 주기도 했고, 하인을 시켜 그렇게 하도록 했습이다.  아니면 최소한 발 닦을 물이라도 주었어야 합니다.  시몬은 예수님께 그러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또 그곳은 건조한 사막 기후였기에, 올리브 유를 머리와 피부에 발라주었습니다.  시몬은 그러지 않습니다.

시몬이 그 세가지를 다 안해 버립니다.  그가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아니였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로 인해 초대한 손님, 예수님을 모독한 격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해석해요. 초대해 놓고 빰 때린 격이라고.  그 식사할 때 미묘한 기류가 흐르지 않았겠습니까?

어느 분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 일리가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분은 자기는 천국과 지옥이 다른 장소가 아니라, 같은 한 곳이라 생각한데요.  그리고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곳이라는 거에요.  문제는 나에게 있어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그곳은 지옥입니다.

교회 가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교회에 억지로 끌려나오면, 지옥 같습니다. 예배 드리고, 성도들 만나는 것이 즐거워 나오면 여기가 천국이에요.

가정을 생각해 보세요.  서로 사랑하면, 같이 있는 것이 천국이에요. 서로 미워하면, 지옥이에요.

시몬은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있어요.  천국이에요 지옥이에요?  마땅히 섬겨야 할 자를 섬기지 않을 때, 지옥이 된다.

반면에 같은 본문에서 사랑을 실천한 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는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른다

이 여인은 감히 식탁에 참여하지 못하고 예수님 발 곁에 있습니다.  그곳은 천국입니까? 지옥입니까?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이 바리새인과 대화를 합니다. 이야기를 마칠 때에는 시선이 그 여인에게 집중되고, 그 여인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 여인의 섬김입니다.

섬김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사랑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Love is as Love Does

사랑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Love is as Love Does

사랑이란, 사랑을 행한 만큼,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동사에요.  아무리 내가 좋은 의도가 있어도, 막상 그것을 행하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사랑을 행하세요.  오늘 섬김에 대해 말해요. 섬김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또한 기왕 사랑을 할 것이라면, 뜨겁게 해야 해요.  사랑이 상처가 되는 것: 사랑이 식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그 사랑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을 때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계 3:16)  뜨뜻 미지근한 사랑이 얼마나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합니까?  결정적 순간에는 차든지 뜨겁든지 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뜨겁다라는 것 앞에서 사랑은 의도 이상으로 행동이라 했지 않습니까?  상대방에 대한 열정 이상으로, 얼마나 신실하게, 헌신과 일관성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점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앞에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써 놓았다. 이것이 활발하게 , 헌신적으로, 일관성있게 되어야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옆에 온도계를 놓았다.  나의 사랑 지수를 점검해 보십시오.  각 항목에 대해 0도~100도까지 자신의 사랑의 온도를 한번 적어보세요.  그래프를 그려보셔도 좋아요.

  • 첫 주에 우리는 선물에 대해 말했고,여러분에게 선물상자를 드렸습니다.여러분의 가정은 선물을 서로 주고 받으십니까?  어느 분이 말씀하세요. 요새는 문자주고 받는 프로그램으로 선물도 주고 받을 수 있잖아요?  누구를 데리고 나가 커피 사주는 것보다, 그걸로 커피 상품권을 하나 보내주는 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  다음은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 그 다음은 “칭찬하는 말”입니다: 혹시 역으로 좌절시키는 말이 오고가지는 않습니까?
  • 의미있는 터치는 몇도나 됩니까?
  • 그리고 오늘 말하는 “섬김” 혹은 “봉사”는 몇도나 됩니까?

테레사 수녀가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사랑 하느냐이다.  그러므로 그대로 하여금 가장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에서 저자인 채프만이 말합니다.  그는 자기는 어려서 농구를 좋아했데요.  토요일에 농구하러 나가려 하면, 어머니가 집안 청소를 안하면 나가 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아주 그게 싫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는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다시는 청소를 안할 것이다.”라고  다짐을 했답니다.  그가 아내를 만났어요. 아내의 제1 사랑의 언어가 무엇이었을까요?  “섬김.”  “봉사”  채프만이 말해요. 자기는 “아무리 큰 돈을 주어도 청소는 안할 것이다.” 생각했어요.  그러나, 집에서 규칙적으로 청소한데요. 그건 100%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집이 천국이 되는 거에요.

왜?  마음의 태도: 비판하는 자 & 용서에 감격하는 자

다시 이야기로 와서  왜 이런 차이가 나오게 됩니까?

42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돈놀이꾼은 둘에게 빚을 없애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대답하였다. “더 많이 빚을 없애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판단이 옳다.”

마음의 문제이고, 태도의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전도사님.  실력도 아주 뛰어나다.  뿐만 아니라 아주 성격이 쾌활하다. 특별히 또 부탁하면, 늘 기분 좋게 그걸 받아주시는 분이세요.  이 전도사님이, 어떤 집사님을 놓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 집사님… 누군가가 부탁하면 상대방을 앞에 놓고 투덜거린다.  “바쁜데”  “힘든데”   그런데, 그러고는 또 맘은 착해서 부탁은 또 들어준다는 거에요.  전도사님이 이 집사님과 친하거든요. 그러니까 농담처럼  “그 집사님 바보”라는 거에요.  어짜피 다 들어줄 거면, 왜 부정적인 말을 해서 상대방 기분 나쁘게 하냐는 거에요.  도와줄 거면, 표정이나 말도 기분 좋게 말해야 한다는 거에요.

이 시몬이라는 바리새파 사람은, 39절이 그 마음을 다 말해 줘요.  예수님을 놓고 무엇이라 하는가?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테인데”  그리고는 그 여인을 누구라 부르는가? “그 여자는 죄인인데” (v39)  이 사람이 바보인 거에요. 그 마음의 불만과 비판적 태도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초대하고도 예수님과 사랑을 누리지 못해요.

이 여인은?  성경에 그녀는 “죄인”이라고 묘사가 되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그녀가 창녀였다고 해석합니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주제를 놓고 생각하면, “사랑에 실패한 여인이에요.”  어쩌면 젊어서 실수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혹은 남편에게 버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돈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녀의 사연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까지 올 때는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이제는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거에요.  그러나, 오늘큰 사랑을 행합니다.  오늘 그녀는 예수님을 온 맘을 다해 섬깁니다.  예수님이 들어설 때부터 그녀는 예수님께 줄곧 입맞춥니다. 행여라도 예수님 오해 살까 그분의 얼굴에도 입맞추지 못하고, 그 분의 손에도 입맞추지 못할 때,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입맞춥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온 것 같아요.  삶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 또 용서와 사랑에 대한 감격이 함께 섞여 나왔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쏟아졌는지, 그것을 닦아내야만 했습니다.

무엇으로 닦아냅니까? 아무것도 없을 때  자신의 머리로 닦아냅니다.  여성분들. 머리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중요한 곳에 가실 때 머리가 준비가 안되면 가시겠습니까?  얼마나 소중한지는 머리카락이 어디에 달려 있는지가 말해준다. 머리 꼭데기.  가장 귀한거에요.  그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외출하고 오면 가장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는 부위입니다.  그래서 아마 신체의 가장 낮은 부분일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높은 것으로 상대방의 가장 낮은 것을 닦아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자세입니다.

그 섬김의 낮아짐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나같은 사람을 사랑해주는 것에 대한 감격이에요.  47절에 예수님 말씀하신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특별히 유명한 설교가 챨스 스펄전 목사님이 잘 말씀해 주세요. “여기서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객관적인 죄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자기가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죄의 용서받은 분량이다.”

그것이 성도의 삶 아닙니까?  구원을 받고, 10년이 지났어요. 이제 절망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지나가요.  그러나 거룩한 삶으로 전진할 수록 죄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지에 대해 점점 깊이 느끼게 되요.  역설적을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깊어져요.  그럴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용서하신 예수님을 더 감사하고 사랑하게 되요.

가정에 적용해 봅시다.

  • 20대 : 그냥마냥 좋아서 산다.
  • 30대 : 애들 커가는 맛에 어떨결에 산다.
  • 40대 : 일에 지쳐 시간 가는줄 모르고 산다.
  • 50대 : 버리기 아까워서 산다.
  • 60대 : 오갈데 없을까봐 불쌍해서 살아준다.
  • 70대 : 여태까지 살아준게 고마워서 산다.

뭐가 가장 복음적입니까?  70대에요.  사실은 그게 진리인거에요. “나같은 사람과 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빚이 있어요. 그럴 때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할 것이라는 거에요.  나는 부족한 사람이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고, 실수도 많아요. 이기적이에요.  역설적으로 그러기에 여전히 나를 인내하고, 용서하고, 데리고 살아주는 것에 대한 감동이 있고, 감사가 있어요.

부모에게, “나같은 사람 길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사실 어린 자녀에게도 감사합니다. “나같은 부모를 여전히 엄마 아빠라고 찾아 주는 것도 감사합니다.”  그러면 만사 해결이에요.

봉사함으로 내가 사랑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인이 와서 예수님 발에 입맞추고, 그 발을 머리로 닦고, 향유를 뿌리는 섬김을 받으세요.  그것은 수동적인 것이에요.  그러나 이 여인은 죄인이고,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 집에 있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대단히 적극적이고 선택적인 수동태에요.

그것을 통해, 신비로운 일을 이루세요.  이 여인의 삶이 변화되게 하세요.  이 여인을 보십시오. 향유 옥합을 깨어서 그 발에 붙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목에 달고 다녔던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직업을 생각할 때, 그것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비웁니다.  그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니까요.

그 순간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되는 순간이에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죄인이 아니에요.용서받은 자에요.  예수님이 용서를 선포하세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것은 세례 받으실 때에 아버지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신 예수님이, 이제 그녀에게 동일한 사랑을 전해주십니다.

뮤지컬 배우 박소연. “사랑의 실패를 통해 깨닫게 된 진실”이라는 강연에서 말합니다.  그녀는 음악을 사랑하여 뮤지컬 배우가 됩니다. 그리고 절어서 사랑을 열정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유명 뮤지컬 배우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8개월만에 이혼합니다.

결혼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저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나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 “노래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생각이 들어, 노래를 그만두게 됩니다.

이제 주변의 권유로 노숙지들에 식사를 대접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점차 사람들이 그녀을 알아보게 되면서 그곳에서 음악회 요청합니다.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반신반의 히며 임시로 작게 설치된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를 몇십분 부르고 내려옵니다.  그러나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노래를 하고 있는 나는 더이상 불행하거니 슬프거니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한 여성이 다가와 고맙다고 인사. 최근에 너무나 힘든 일이 많아 몇달 동안 아무것도 못했는데 노래를 듣는 동안 그 생각이 안났다고 하면서, 마음이 치유를 받았다 말합니다.

그 순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음악이 나의 최고의 사랑의 능력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로, 나는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살아하게 됩니다.

참된 섬김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가지 사랑의 언어: 3. 살리는 말

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다들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이 암살당하기 두달 전에 그가 설교를 합니다. 제목이 The Drum Major Instinct 군악대장의 본능입니다.  설교에서 그는 “내 장례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 나는 긴 장례식을 원치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의 추도사를 한다면, 너무 길게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가끔씩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생각해 봅니다.  내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해주세요.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또 3~400개의 다른 상들을 받았다고 말하지도 말아달라고 해주세요.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학교 다녔다는 말도 하지 말라고 해 주세요.

그 날에 마틴 루터 킹은 자기 목숨을 내 주어 다른 사람을 섬기려 했다고 말해 주십시오.

그 날에 마틴 루터 킹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했다고 말해 주십시오

두달 후에 킹 목사는 암살을 당하고, 그 장래식이 TV를 통해 전국으로 방영될 때 그가 한 말, “마틴 루터 킹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했다고 말해주십시오”라는 인용구가 방영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말을 합니다.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내가 한 말을 인용한다면, 무슨 말을 인용하겠습니까?

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말 한마디가 우리의 삶을 바꿔놓습니다.
사랑하는 젊은 남녀를 생각해 보세요.
둘이 좋으면 수많은 사랑의 행위를 해요. 손 잡고, 선물을 주고 받고, 함께 시간을 지내고, 서로를 섬기고…  그런다고 둘이 하나가 됩니까?  아니에요.
심지어 요새는 동거도 많이 해요. 그렇다고 하나가 됩니까?  아니에요.
언제 하나가 됩니까?
요새는 청혼들 많이 하잖아요. 남자가 무릎꿇고 “나랑 결혼해 주세요” 할 때, 여자가 “네”라고 대답하면 되요
결혼식장에서 주례자가 “신랑은 이 사람을 아내로 맞아 한평생 사랑하겠습니까?”할 때, “네”하고 대답해야 해요.

말이 우리의 인생을 몰고가요.  그 말이 길 필요도 없어요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하십니까? 어제 한 말, 혹은 한 주간 한 말을 떠올려 봅시다.  어떤 말을 하셨습니까?

  • 격려의 말이었습니까? 상처의 말이었습니까?
  • 살리는 말이었습니까? 죽이는 말이었습니까?

죽이는 말

오늘 본문에서 대표적으로 죽이는 말하는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세벨이에요.

  •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 가장 화려한 곳, 왕궁에서 사는 자, 가장 부유한 자입니다.
  • 그 정도면 빠질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한가지 큰 문제가 있어요: 말이 살벌해요.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죽이는 말이에요.

  • 그가 하는 말이, 듣는 사람에게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빼앗아가요.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보세요.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 그리고 기도합니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지난 삼년동안 기도하고, 자기 목숨을 걸고 해온 일이 있어요. 그 의미와 가치를 빼앗아 가버려요.

가만히 이세벨이라는 여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불쌍한 여인입니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알지 못합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인격이 망가졌는가 싶습니다.

그녀가 행복했을까요?  오늘 본문이 열왕기상 19장입니다.  그 앞에 17장-18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3년이나 가뭄이 듭니다. 그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살 소망을 잃어버려요.

왜 가뭄이 들었을까?  최고 지도자의 입에서 오고 가는 말이 죽이는 말인데, 그 땅이 어찌 가뭄이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세벨이라는 여인의 가정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 가정이 평안했겠습니까?

아까 교독문에서 우리는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가만히 이걸 묵상하면서 오래된 유치한 사랑의 고백이 떠올랐어요.  그대가 없는 세상은 뭐같아요?  “단무지 없는 김밥”이요, “앙꼬 없는 찐빵”이요.  단무지 없는 김밥을 돈 주고 사시겠습니까?  앙꼬 없는 찐빵을 사 드시겠습니까?  좀 심각한 질문을 해볼까요?  말에 사랑이 없는 사람과 같이 사시겠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어, 지식, 신념을 가졌어요, 능력을 행해요, 선행) – 사랑 = 0

Gottman: Four Horseman

시카고 대학의 John Gottman이라는 심리학 학자가 100명의 커플을 대상으로 그들의 갈등에 대해 조사해 봅니다.  결과가 나옵니다.

첫째는,정서적인 관계가 유지되는데,주기적으로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걱정해야 하는 관계가 있어요. 정서적 갈등이 없는 관계: 감정적으로 거리가 너무나 멀어져 버렸습니다.

두번째로. 그가 말해요.  부부간에 대화를 5분만 듣고 분석하면, 90%의 정확도를 가지고 그들이 계속 결혼생활을 할지 이혼할지 예측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가 말합니다. 감정적인 갈등이 찾아올 때, 네가지를 조심해야 해요.

첫째는, 비난하는 말을 하면 안되요.
우선은 불만과 비난을 구별해야 해요.

  • 불만: “부억을 정리 안되어 있으면, 나는 심기가 불편해 집니다.  아침에 커피마실 때 주변이 정리정돈이 되어야 기분이 좋답니다.  자기 전에 정리를 해 주면 안될까요?”
  • 비난: 거기에 한 마디만 더하면 된다는 거에요. “당신 뭐가 문제요?”
  • 불만: “당신이 늦게 들어오는데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연락하기로 하지 않았었나요?”
  • 비난: “당신 생각이 있는 겁니까? 자꾸 잊어버리는데, 당신 이기적이에요.  딴 사람 생각도 안하나?  내 생각은 절대로 안하지요?”

비난 하는 순간 상대방에게 사랑이 아니라 상처를 주어요.  그러면 그가 변하던가요?  그건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이래요.

둘째는, 경멸의 말:

  • “그것도 모르냐?” “이 바보야”  “등신아”  어느 영화 보니까 “닭 대가리”.
  • 혹은, 말도 필요가 없어요. 그냥 표정만으로도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줄 수 있어요.

연구 결과가 심각하다:

  • 혹독하게 비난하는 말과, 경멸하는 듯한 표정이 약간만 있으면 상대방의 심장박동이 올라간다는 거에요.
  • 비난과 경멸을 받으면, 우리의 뇌가 싸움의 모드로 가거나 혹은 도피의 모드가 된데요.

셋째로, 싸움의 모드로 뇌가 가면 어떻게 됩니까?  상대방을 공격하게 되요.

  • “그럼 너는?”

이 말을 하고 나면, 싸움이 끝납니까? 아니면 불에다 기름을 끼얹은 결과가 됩니까?  잘못하면 폭력으로 연결되기도 해요.  그리고 승자가 없어요.

넷째로, 도피의 모드로 가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엘리야가 도망의 모드가 된 것 아닙니까?

도피의 모드가 될 때 아무 반응이 없는 담벼락이 된다.

  • 주로 남자들이 이렇게 된데요. 여자들을 더 화나게 한다.
  • 여자들도, 주로 남편의 폭력 이후에, 이렇게 될 수 있데요.

여기까지 가면, 이제는 결혼생활을 할지, “전문적 연합”이 될지가 놓여있다.

살리는 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말, 칭찬의 말, 존중해 주는 말,  사랑의 말이 필요합니다.

작가 박완서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57세가 되던 해 남편이 병으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는 6개월만에 다시 25세의 아들이 죽습니다.  본인이 말합니다.

  • 자식이 다섯이나 있지만 그 중에 유일한 아들입니다.
  • 명문대 의대를 나와 의사가 된 자랑스러운 아들입니다.

그 순간 그의 인생이 곤두박질 치고 맙니다.  삶이 허무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살 맛이 안나고, 밤에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그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일기를 쓰고 그것을 출판합니다.  책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한 마디만 하소서”  예수를 믿는 자이기에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 “한 마디만 하소서”

그 한마디는 어느 한 마디입니가?

  • 엘리야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 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말
  • 살기를 포기한 자에게, 다시 생의 의지를 주는 말
  • 낙심한 자에게, 다시 힘을 주는 말
  • 도피한 자에게, 다시 가야할 길을 가게 해 주는 말
  • 가정이라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말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생명의 말씀을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말씀의 두 가지 특징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입니다.

연인들이 사랑의 대화를 할 때, 크게 소리 지릅니까?  부드럽고 조용하게 대화합니까?

어린애에게 [혼내듣이] “I love you”라고 말하면, 아이는 울어요.  그러나 애교부리면서 “미워~ 미워~”라고 말하는 것의 뜻은 무엇입니까?

대화의 내용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말하는 어투도 중요해요.

둘째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미래 지향적인 말입니다.

하나님과 엘리야의 대화의 내용을 보세요.  엘리야는 자꾸 과거의 것을 말해요

  • 14절에 보면, 말이 “나는 이제까지…”라고 말하면서 시작해요.
  • “열심히 주님을 섬겼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고, 예배드리는 제단을 헐었고,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 그럴 때 그의 현재는 그 죄로 잘못된 과거의 결과에요.
  • “나만 홀로 남았고, 나마저 죽이려 합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의 말에 어떻게 대답합니까?

  • 과거의 일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오로지 미래 지향적이에요
  • 다마스쿠스로 가서 하살엘에게 기름을 붇고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고
  •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뒤를 잇게 한다.
  • 엘리야의 현재는 과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고 반성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 과거에 억매이면 지금의 문제를 벋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라는 후회와 죄책감만 찾아오고, 지금의 내 처지가 불행해 질 뿐입니다.

그럴 때 옆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희망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해요.  장래의 약속에 대해 말해야 해요. 그럴 때 약속을 받은 자는 소망이 생겨요.

이 하나님 말씀 앞에 괄호가 하나 붙었으면 좋겠어요.

  • 괄호치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나는 너를 이미 용서했다.”
  • 그러니 지금은 예전 일을 말하지 말자.
  • 언약이 있기에, 그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을 충실되이 유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 하나님이 의지적으로 용서를 선택하는 거에요.

사도 베드로가 말해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거기에 지혜가 있어요.  내 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해요.  말해야 할 때와, 말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알아야 해요.

분이 나면 말을 뱉지 말고 참으래요.  언제까지?  입에 침이 찰때까지 기다리레요.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주세요”라 기도하며 분별해야 해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살리는 말인지 죽이는 말인지, 변화하게 하는 말인지, 변명하게 하는 말인지, 사랑하게 하는 말인지 싸우게 하는 말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한 엘리야를 사랑의 말, 생명의 말로 대합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비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 엘리야를 살리고, 그리고 그 말씀이 엘리야와 함께 할 때,그럴 때 엘리야가 사람에게 기름을 붇는 사람이 되요.

엘리야가 이전까지는 능력은 많으나, 외톨이었습니다.  그 때는 수많은 능력을 행사하나 이스라엘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대표적으로 엘리사와 선지자 학교.

호렙 산으로 가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엘리야의 행적을 생각해 봅니다

17장-18장에서 그가 개인적으로, 사역적으로, 내적으로 또 외적으로 수 많은 일을 당할 때에, 그가 그것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라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19장에서 엘리야가 위기에 빠진 것은 “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로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어다.

우리는 호렙산으로 갑시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홀로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들어야 해요.

우리에게는 엘리야보다 더 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그가 십자가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 조롱을 받으십니다.  예수는 조롱 받으실만한 분이 아니셨거든요.  그가 조롱을 당함은, 그러함으로 예수를 믿는 자에겐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는 아버지의 사랑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심입니다.

5가지 사랑의 언어: 1. 선물

“결혼 후에 사랑은 어떻게 하나요?”

개리 채프먼은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옆사람이 자신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묻습니다.  그가, “결혼 생활 상담도 하고 결혼 생활 세미나도 인도합니다”라고 대답하자, 그가 질문합니다.

“오랫동안 궁금하게 여기던 질문이 하나 있는데, 도대체 결혼 후에 사랑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는 자기 사연을 말합니다. 그는 세번이나 결혼을 하였다.  첫 번째 결혼은 10년, 두 번째 결혼은 3년, 세 번째 결혼은 6년 정도 지속되었다 말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매번 결혼할 때마다 결혼 전에는 무척 좋았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결혼 후에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갔습니다. …    나는 교육도 제법 받았고 사업도 성공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결혼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결혼하기 전에 2년간 교제하면서, 서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서로 진실로 사랑한다고 느꼈다고 말합니다.  결혼 후에도 그는 아내에게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당신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의 남편이 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라고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아내는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쓰레기를 버려주지 않는다.  옷을 옷걸이에 걸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사소한 것에 대해 불평합니다.  나중에는 남편을 신뢰하지 못할 사람으로 여기면서 그가자기에게 충실하지 못하다고 인격적으로 모독합니다.  그가 말합니다

“아내는 완전히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혼 전에 아내는 결코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내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긍정적인 사람이었지요.  그게 아내의 매력이었어요.  나는 아내가 불평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어요.  내가 하는 일 모두가 그녀에게 훌륭한 것으로 보였으나, 일단 결혼하고 난 내가 잘하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솔직히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내에 대한 사랑은 서서히 식어지고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말합니다.

“결혼 후 사랑은 어떻게 합니까?  …  내가 겪은 이러한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흔히 일어나는 일인가요?  …  사람들은 공허한 상태로도 사는 법을 터득한 것인지 아니면 결혼 이후에도 사랑이 실제로 계속 유지되어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2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개리 채프먼이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사람들마다 사랑의 언어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외국인을 만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중국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워 아이니”  미국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에게는 무엇이라 해야 합니까? “I love you.”

나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요.  내가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상대방이 반드시 그걸 알아주나요?  아니에요.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해야해요.  더 나아가 나의 표현이 아니라 상대방의 표현으로 표현해야 해요.

앞에서 말한 남자의 사랑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의 아내가 바랬던 것은 무엇입니까? 아내의 일을 같이 도와주는 섬김이었습니다.

이 남자가 했어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의 사랑의 모국어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말이다.  그에게 섬김이라는 언어는 제2의 언어.  외국어 같은 것입니다.   잘 모르거나, 할 줄 알아도 어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걸 열심히 배우고 연습해서 자연스럽게 되도록 터득해야 합니다.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

그럼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랑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까?  채프만은  다섯 가지만 배우면 된다고 말합니다.

  • Words of Affirmation: 인정하는 언어
  • Quality Time: 함께하는 시간
  • Receiving Gift: 선물
  • Acts of Service: 봉사 혹은 섬김
  • Physical Touch: 스킨십 (번역이 맘에 안든다. 신체적 접촉)

채프먼의 책 뒤에 보면 사랑의 언어 검사표가 있습니다.  검사는 금방 할 수 있습니다.  서로 결과를 비교하고, 그리고 대화를 해 봐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언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

오늘은 특별히 선물에 대해 말해봅니다.

 요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1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주셨으니”

그분은 너무나 우리를 사랑해서 아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 버렸습니다. 적대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적극적을 대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분명히 상처를 받았을 텐데 마치 첫사랑을 하듯이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극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Peace Child

그것을 잘 표현하는 것이 Don Richardson이라는 선교사가 쓴 평화의 아이 Peace Child의 이야기입니다.  리차드슨과 그 아내는 뉴기니의 선교사였습니다.  그와 아내가 사위족이라는 부족에게 선교사로 갑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 넘긴 사람. 가롯 유다의 이야기를 말하게 됩니다.  그 때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위족에게 가롯 유다가 영웅이 됩니다.  사위족은 식인종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의 친구가 되어, 상대방이 완전히 자신을 신뢰할 때에, 그를 속여서 잡아먹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명이 되어 3년이나 따라다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그는 대단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선교사에게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이를 어찌하나 고민하던 중 사위 부족끼리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 후에 그들이 서로 화해를 하는데, 화해하는 징표로 서로 부족끼리 어린 아이를 교환합니다.   그리고 우리 부족의 아이가 상대방 부족에서 살아 있는 동안은, 서로를 속이지도 공격하지도 않습니다. 둘이 화해하게 됩니다.  이 아이가 바로 평화의 아이입니다.

그걸 선교사가 보는 순간 돌파구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주신 외아들 예수가 바로 “평화이 아이”아 됩니다.  특별히 화해의 아이 중 하나가 아닌, 궁극적인 화해의 아이. 영원한 화해의 아이가 됩니다.  그것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선물을 주셨습니다.  바로 화해의 아이 독생자 예수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언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두 번째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우리와 같이 되어, 즉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고 선택하시고, 그것을 사용하셨습니다.

그 선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선물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자마다”

  • 멸망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것이 신비롭다.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랑이 있으면 다시 회복됩니다.
  • 영생을 얻게 한다: 그리고 회복될 뿐 아니라 생명을 누리고, 더불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한 주간 선물 준 남자

그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우리도 가서 사랑이 선물을 줍시다.  여러분에게 상자를 드렸습니다.  한주간 가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십시오.  특별히 기도하면서 준비하여 주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이다.

특별히 선물이 자신의 제1의 언어가 아닌 분들, 가서 그렇게 하십시오.  돈을 절약하고 저축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에게 선물 주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더 소중한 것입니다.  간단한 것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때로는 선물은 사진 한장일 수도 있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만한 신문 기사를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채프먼의 책에 보면 Doug라는 한 남자와 그 아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아내가 좋은 아내가 되려고 노력을 하지만, 정작 본인은 남편에게 사랑 받는 느낌이 없고, 심지어 이용당하고 무시당한다 생각이 듭니다.  남편에게 말하면,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자기는 성실하게 남편의 역할을 하는데 왜 그러느냐고 말합니다.

두 사람이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 세미나에 참석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월요일 오후에 장미 한 송이를 내밉니다.  아내가 감동받아서 울먹이면서 “여보, 참 자상하네요” 말합니다.  화요일 오후 1시30분에 전화를 걸어 저녁 시사로 피자를 사 가겠다고합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겠다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껴안으면서 너무 기쁘다고 말합니다.  수요일에 퇴근하면서 아이들에게 크레커를 사다주고, 아내에게는 예쁜 화분 하나를 사다 주었습니다.  장미꽃은 금방 시들지만, 식물은 오랫동안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목요일에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 남편이 카드를 하나 내밉니다.  항상 말로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기에 카드에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 지를 적었습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토요일에 아이들을 맞기고 둘이 외식하고 올까?”  금요일에는 쿠키 가게에 들려서 쿠키를 사오고는 가족들을 놀래 주려고 식후에 꺼냅니다.  토요일에는 약속한데로 외식을 합니다.  아내가 묻는다.  “당신에게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알지 못하겠어요.”

남편이 말합니다.  세미나에서, 아내의 사랑의 언어가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지난 몇 년동안 선물을 사주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아내가 말한다.  “그렇다고 매일 선물해주면 파산하잖아요.”

남편이 대답합니다.  “맞아요. 그러나, 한 주에 한번은 선물을 해 줄께요.”  그리고 그는 삼년동안 그 일을 성실하게 합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이 우리의 삶을 치유합니다.  사랑이 우리로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누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