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aking Free

Breaking Free: 4. 더이상 혼자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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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이 쓴 책 중에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는 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루는 그가 속한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로 검은 리무진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캐시라는 70대의 부유한 여인이 내립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 말합니다.  몇 년 동안 정신과 의사를 만났지만 더 나빠지기만 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뉴욕 타임즈 사회란에서 대통령과 영부인으로부터 백악관 오찬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읽을 때마다 그 명단에 내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침체가 됩니다.”  또, 그녀가 말합니다. “내가 가진 돈의 반도 갖지 못했거나, 내가 맺고 있는 연줄의 반만큼이나 연줄도 없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매력적일 때, 저는 매우 매우 침체됩니다.”  그녀는 뭔가를 잃어버릴 때마다 성 안토니 성당에 1000불을 헌금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랬더니 예배 드리러 가면 사제가 묻는답니다.  “이번 주에는 뭐 잃어버린 거 없나요?”

그녀에 대해 나우웬이 이렇게 평합니다.

“여기 인간이 꿈꿀 수 있는 모든 것—돈, 명예, 연줄, 대단한 권력—을 소유한 한 여성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부유하지만 가난한 사람.  유명하지만 자기 회의에 빠진 사람.  위대하지만 너무나 작은 사람이다”

이 말을 한 후에 나우웬이 말합니다.

“순간 그녀의 침체가 내게 와 닿았다.  캐시는 우리 모두가 하는 동일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모아 놓은 세속의 장식물 없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안다 해도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할까?  우리가 더 이상 그들에게 쓸모 없게 되면 우리를 잊어버릴까?’”

솔직하게 말하며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나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논리적인 논증이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도움은 참된 사랑을 만나는 데에서 올 것입니다.  사랑과 인정과 돌봄을 받을 때, 자기 자신과 깊은 관계를 느끼게 되고, 그러면 이전과 다르게  더 이상 침체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연약한 모세를 만납니다.  그는 “신화”를 쓴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상황에서 그는 홀로 돌파구를 낸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모세도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침입자가 공격해 옵니다.  이제 모세는 젊은 여호수아를 내보내 싸우게 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산에 올라가 그 팔을 듭니다.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팔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해집니다.  전쟁입니다.  팔을 올리고 있어야하겠는데, 거기에 나와 공동체의 운명이 달렸는데, 어느 순간 더이상 피곤해서 팔을 들 수 없는 순간입니다.  한계 상황이에요. 위대한 지도자가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신기하게 그 한계의 상황에서 그는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 와서 모세를 앉게 하고, 그들이 각각 그 양쪽에 서서 그의 팔을 붙들어 올렸다.  해가 질 때까지 그가 팔을 내리지 않았다”

모세의 한계 상황을 극복하게 해 준 것은 그의 곁에 서서, 그의 지친 팔을 붙들어 올려 준 친구의 손이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었을 거에요. 그러나 내면에 깊은 일치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행동이에요. 그러나 그 감격과 감사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이것을 어떻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이렇게 부르기로 했어요.  “은혜적 사랑”

벌거벗은 모세를 보면서,  그를 비난하지도, 그를 떠나지도 않고, 여전히 그를 기뻐하며, 돌보며, 섬기는 것.  그 은혜적 사랑이 있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은혜적 사랑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있음으로, 인생을 계속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그가 태어난 때는, 바로가 히브리인들에게 태어난 아들들을 죽이던 때에요.  태어나서 석달이 되었을 때에 더 이상 감출 수 없어서, 그 어머니가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흘려 보내요.  절대적 고립의 순간이에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무기력한 상황이에요.  바로의 딸이 그를 건져내고, 히브리 아기인줄 알면서도 그를 양자로 삼아줍니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 오히려 이집트 왕자가 되어 왕궁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어요.

그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에, 이집트 인을 죽이고 도망쳐서 미디안 땅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이집트 왕족의 복장을 한 자가 홀로 사막을 건너왔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문제가 있는 것이 뻔히 보였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회피하고 외면할 때, 그 땅의 제사장 이드로가 그를 맞아들이고, 자신의 딸까지 주어 사위로 삼아줍니다.  그 땅에서 가정을 꾸리고 양 때를 칠 수 있었어요.

강야에서 므리바에서 물이 없을 때, 백성들이 원망하고 돌을 들어 그를 치려고 해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그들 앞에 서서 걸어갑니다.  이미 다툰 상황입니다. 모세를 안 따라가면 그만인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뢰하고 따라가주는 사람이 있기에, 호렙산 바위 앞까지 갈 수가 있었어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간에 섰을 때, 나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비한 섭리에 대해 생각해 봐요.  모세의 인생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면 decrescendo에요.  그 인생의 첫 40년은 왕궁에서의 부와 권세를 누리는 삶이었어요.  그 다음 40년은 꼭 그렇게 화려한 삶은 아니지만, 좋은 집안 출신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며,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는 기업이 있는 안정된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모세를 부르시고, 또 인도하셔서, 광야로 이끌고 갑니다. 그의 마지막 40년의 삶은 셋째는, 불안정한 삶입니다.  처음에는 먹고사는 것조차 어려웠고, 그로 인해 여러 번 불평이 있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날 벌어서 그날 먹을 수 있지만, 여전히 사는 곳이 그리 안전하지 않아 무단침입을 받기도 합니다.

질문이 생겨요: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 왜 모세를 그렇게 인도하십니까?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러나 그것만이면 모세는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모세에게도 그 과정은 치유의 과정인 거에요.

미국 포틀랜드에 Imago Dei Community라는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를 세운 분은 Rick McKinly라는 분이에요.  그의 사역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어요.  그분이 어느 podcast에 나와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고백해요.  그는 자신은 일을 하는 데에는 믿음이 있데요. 사역을 만들고 일이 되게 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다는 거에요.  그의 약점이 있어요. 과거에 예수 믿기 전에 문제가 많던 사람이었거든요.  이제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고백해요.

가만 보면 모세가 바로 이 Rick 과 같아요.  지금까지의 모세의 믿음은 능력을 행하는 믿음이었어요.  이제 오늘 하나님이 그를 한계 상황으로 몰아붙입니다. 신기하게 그 한계 상황을 통해, 그는 남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요.

신기한 것이 있어요.  지금까지 광야에서 모세는 늘 One Man Show였어요.  홍해를 가를 때도 혼자 기도해야 했고, 혼자 행동해야 했어요. 물이 없거나 먹을 것이 없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오늘 모세가 은혜의 사랑을 배우고 난 후에, 그 다음 장 18장에 가면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조직이 구성되고, 리더들이 세워지고, 모세와 함께 동역하는 동역자들이 세워져요.  모세가 은혜의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이스라엘이 함께 모인 개인들이 아닌, 참된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은혜적 사랑은 내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내면을 치유하는 것 뿐 아니라, 외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된다.

13 이렇게 해서,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준 것은 모세가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손을 들고 내리지 않은 것이 중보기도이고, 기도가 멈추면 안된다 말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는, 모세가 손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주었기에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에요.

하나님은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세요.  혹시 여기 주변에 어려운 상황에서 고립된 자가 있습니까?  가서 그에게 은혜의 사랑을 베풀어 주세요.  대단한 큰 일이 아니어도 되요. 찾아가 그 손 한번 잡아주는 것을 통해 그가 계속 살아갈 이유가 생기고,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거에요.  또한 그 은혜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 지금 한계 상황에 처한 자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인도한 것을 믿으세요.  그것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시고, 나로 자신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는 것인 것입니다.

오늘 모세의 두 손을 든 모습을 통해 연상되는 또 다른 한 분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분께로 나아오십시오.  모세는 한계 상황을 통해 은혜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그 분이 그렇게 하심은, 그러함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은헤의 사랑을 받도록 하게 하심입니다.

Breaking Free: 3.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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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와 해파리

여러분, 돌고래와 해파리의 차이를 아십니까?  네 물론 차이가 무척 많죠.

John Piper 목사님이 해파리와 돌고래를 이렇게 비교합니다.

  • 해파리는 물위를 둥둥 떠다닐 뿐입니다. 파도에 밀려다닙니다.
  • 그러나 돌고래는 그렇지 않아요. 돌고래는 헤엄을 쳐요.  돌고래의 속도는 약 시속 30km가 된다고 해요.   때로는 역방향의 해류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같은 방향의 해류를 타고 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해파리가 되고 싶으십니까?  돌고래가 되고자 하십니까?

  • 하나님이 예수 믿게 해주신 것은 우리로 돌고래처럼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 그런데, 정작 우리는 자꾸 자기가 해파리인 줄 알고, 해파리처럼 살때가 있지 않습니까?
  • 물로 해파리 중에는 큰 놈은 2m 짜리도 있데요. 그러나 해파리는 해파리인거에요.

좀 심각한 예기를 해볼께요.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명한 심리학자입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에 수감됩니다.  전쟁 후에 그가 심리학자로서 그 경험을 내부자이며 또한 참여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이 Man’s search for meaning 입니다.  우리 말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로 번역된 책입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그 수용소에서 일어난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대해 말합니다.

  • 그러면서 그는 수용소의 수감원들이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는 것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그것이 사실은 사형당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해도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럴 때, 몸이 아프거나 약한 자를 고르는 과정에서 수용소 수감자 사이에 투쟁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자기 가족, 자기 친구가 그 이송 리스트에서 빠지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이 대치되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 그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 과정에서 도덕적 거리낌이 다 없어져 버리고. 생존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필요하면 잔인하여지거나 친구를 배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중에는 기적적으로 생존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에는 그들의 가장 선한 모습에 더이상 남아있지 않게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최선을 잃어버린 사람들

오늘 본문은 또 다른 생사를 오고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악재가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납니다.  15장부터 쭉 보면

  • 처음에는 쓴 물 밖에 없어 마실 수 없었고,
  • 그 다음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합니다.
  • 한 고비 한 고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간신히 해결하고, 이제 한숨 돌리려나 했더니, 다시 한번 마실 물이 없어서 위협을 받습니다.

악재의 연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두 가지 증상을 보입니다.

첫번째는 다툼입니다.

  • 므리바라는 지명: 다툼
  • 상황이 어려워지면 처음에는 원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쌓이면 어느 순간 다툼으로 번지게 됩니다.
  • 특별히 다투었다라는 이 말은 사실은 법적 용어이다. 백성들이 지금 지도자 모세를 고소한 것입니다.
  • 실재로 화가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을 들어 모세를 치려합니다.

두번째는, 의심입니다.

  • 그곳의 지명이 맛사라고도 불렸습니다.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과거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능력을 경험했다.
  • 그러나 오늘 다시 어려움이 찾아올 때 또 다시 의심이 든다.

잠시 멈춰서, 이스라엘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좀 불편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생존에 관련된 일입니다. 목숨이 오고가는 마당에 분쟁이나 의심이 듭니다.  그러나 이해는 들지만 안타깝습니다.  자신들의 최선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살아남으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에요.  이 일이 다 지나고 나서 찾아오는 후회와, 자신과 남에 대한 실망과, 원망은 이루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사람의 양면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 한쪽으로는 사람은 생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 다른 한쪽으로는 존엄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 그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면 좋겠는데, 많은 경우 둘 중 하나를 위해 다른 한 쪽을 희생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습니다.
  • 그러나, 생존이 참된 생존 되기 위해서는 존엄성을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Best of Moses

감사하게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의 최선을 끄집어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

모세는 지금 최악의 상황에 있습니다.

  • 외적으로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가
  • 내부적으로는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한다.

17:4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 모세도 사람입니다. 그의 부르짖음이 그의 흔들림을 보여줍니다.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모세라고 의심과, 두려움, 그리고 미움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겠는가?

최선을 끌어내시는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가 분위기와 감정에 떠내려가지 않게 막아 줍니다.  도리어  최악의 상황에서 모세의 최선을 끌어냅니다.

출17: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서 가거라. 그리고 나일 강을 친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거라.

“이 백성보다 앞으로 가거라”

  • 왜 그 말씀을 하셨을까요? 중세의 랍비 Abraham iban Ezra: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신 이유는 모세가 백성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해석합니다.
  • 더불어 생각해 봐요. 모세의 입장에서 두려움도 있지만, 더불어서 “자기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아무리 기적을 베풀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이끌고 싶겠습니까?
  • “집어 치워” 말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백성들 앞서서 간다.

  • 이 장면을 보면서 생각나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 바로 목자가 양 때를 이끄는 모습입니다.
  • 서양에서는 목자가 양 때를 뒤에서 몰고 갑니다
  •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에서는 목자가 지팡이를 들고 양 때 앞에 서서 간다. 그럴 때 양 때가 목자를 따라갑니다.

모세로 돌아옵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앞에서 그들을 이끌어서 마실 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걸 은혜라고 하는 거에요.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그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  그것을 위해 필요한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 마음에는 미움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행함으로는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에요.
  • 속으로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에요. 그러나 행함으로 담대하게 나가야 해요
  • 내면에 본인도 의심이 들며 흔들렸을 거에요. 그러나 행함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보이는 것이에요.
  • 그러기에 의지적 결단이 필요해요. 하기 싫은 내 맘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에요.

연극하는 것이 아닙니까?  위선자가 아닙니까?

  • 그 목적이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일 때에는 아니에요.
  • 특별히 상대방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것이 없는데, 그 일을 행한다면,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자기 희생이에요.

놀라운 것은, 그 은혜에 대한 의지적 행동이 있을 때에야, 백성에게 물을 주는 능력의 자리로 갈 수 있었다는 거에요.

  • 모세는 백성을 므리바 혹은 맛사에서 인도해서 호렙 산 바위 앞으로 인도할 수 있었어요.
  • 은혜의 사람이 다툼과 의심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 그리고 만족과 생명의 자리로 이끌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사람이란

  •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과 서로에게 화해하게 합니다.
  • 은혜의 사람은 그것을 위해 대가를 치루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이 그의 최고의 모습이 나오는 시간입니다.

  • 상황이 최악이라고 나의 모습이 악으로 치달을 필요가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서라고 최선을 포기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최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요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대가를 치루셨어요.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쳤어요.

  • 지팡이는 나일강을 친 지팡이: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노예로 만들고 압제할 때.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나일강을 친다.   물이 피로 변했다.
  •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
  •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그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칠 때, 하나님이 그 바위 위에 서 계셨어요. 하나님이 맞으신 거에요.
  • 이스라엘이 맞아야 할 것을 하나님이 대신 맞으신 거에요.
  • 그것을 통해 불평하고 다투고 불신앙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져요.
  • 그러나 동시에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은혜가 나와요.
  • 그래서 바위에서 생명을 주는 물이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4 에서 모세가 내려친 그 바위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맞아서 깨어짐으로,
  •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이 형벌을 면하고,
  • 아무 자격없는 자가 생명의 은혜를 내어 주신거에요.

평택의 적십자 회원들

어제 뉴스에서 두개의 감동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첫째는 평택의 적십자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

  • 잘 아시지만 평택이 메르스가 시작된 곳이잖아요.
  • 도시의 모든 것이 위축된 상황인데,
  • 적십자 자원봉사자들이 자발적으로 다시 봉사를 시작하면서, 이들이 홀로 사는 노인들을 다시 방문하고 돕기 시작하는 것이 뉴스에 나왔어요.
  • 그 자원봉사자 한명이 인터뷰하는 것이 나와요. “언제까지 위축돼 있을 수는 없잖아요. 누군가가 먼저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 저희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 외부자가 가기에는 아직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내부자로써는 그것을 할 수 있는거에요

적십자라는 것 자체가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에서,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 아닙니까?

  • 그 정신의 중심에 십자가를 세겨놓았다는 것이 얼마나 상징적입니까?

이 자원봉사자들의 사랑과 희생과 용기가 저에게 감동이 됩니다.

여전히 외부자가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에요.  그러나 내부자로서 이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지하면서, 그 일을 담대하게 할 때, 이들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요.

또 하나가 있어요.

  • 미국의 한 21살 된 백인 청년이 Charleston Church라는 흑인 교회의 성경공부에 참석해서는, 그 자리에서 총으로 9명을 죽였어요.
  • 그 중에는 그 교회 목사님도 있었어요.
  • 이 사람이 재판을 받을 때, 그 주의 관습이 있어서, 피해자의 가족들이 그 살인자에게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순서가 있어요,
  • 한결같이 나와서 하는 말은 두 가지에요. 첫째는, 그들이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고 말해요.  어떤 사람은 “내 몸의 세포가 다 아프다”라고 말해요.
  • 그런데, 그 이후에 그들이 또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용서한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그들이 이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 말해요.”
  •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너를 축복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해요.

이것이 충격이 되었어요.  그 중 한명이 기자 회견에서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이 평범한 흑인 여인이 대답해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마음에 미움의 자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게 예수 믿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비 상식적인 일을 한다고 해요.  그러나 이런 비 상식적인 일이 있기에 이 세상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교회를 너무 열심히 다니면 “광신”이라 하잖아요.  그러나 이런 광신이 우리 사회에 넘쳐서 문제가 아니라 부족해서 문제 아닌에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더 깊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믿는 자로 어떤 상황에서도 은혜의 사람 되게 하십니다.

예배

이 모든 일을 말씀 드리고 이제 여러분을 경배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한 장소는 바로 하나님의 지성소입니다.

그 바위 위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그곳에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참된 목자가 되어서 인도해 주시고,
하나님 서 계신 반석에서 생명의 물이 흘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게 예배 아닌가요?

그걸 묵상하면서, 예배를 시작할 때 늘 낭송하는 시편 100편이 생각나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지금의 나의 육신의 목마름을 채워주시는 것을 통해,
더불어 나의 중심의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시는 하나님,

그것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막대로 치시는 하나님

  • 모세는 막대 지팡이를 들고 갔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 모세는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셔 갈증을 해소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셨습니다
  • 모세는 반석을 지팡이로 내리쳐 물을 내었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물을 내시기 위해 창에 찔려 허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그러함으로, 우리에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십니다.

Breaking Free: 2. 하나님을 탐욕함

어느 사람이 화가 나서 하나님께 나가 항의합니다. 대화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주님!

주님: 그래, 말해보거라.

먼저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주님: 그래, 화내지 아니하마

왜 오늘 저에겐 힘든 일만 있었던 겁니까..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셨나요..?
평소에 늦게 일어난 적이 없던 제가, 중요한 약속이 있는 오늘 늦게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시작의 불과합니다.. 차의 시동이 오랫동안 걸리지 않아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나: 바쁜 와중에 점심식사로 샌드위치를 주문했는데, 점원의 실수로 또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전화가 걸려와 받았더니 갑자기 핸드폰 안테나가 안 잡혀 전화가 먹통이 되지 뭡니까..
결국 지친 몸을 달래며 집에 도착한 저는 어제 막 구입한 마사지 의자로 피로를 풀까 했는데.. 이 새 의자도 고장이 났는지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루 제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어요.. 왜 저에게 이러신 것입니까??

주님:
그래, 내 말을 들어보거라. 오늘 아침 죽음의 사자가 네 머리맡에 있더라,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나의 천사를 보내 싸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너를 늦게까지 자게 한 것이니라.
네 차의 시동이 늦게 걸리게 한 이유는, 너의 집 앞을 지나쳐 갔던 술에 취한 트럭 운전사 때문이니라
편안했어야 할 너의 점심 시간에 처음에 너의 샌드위치를 만들던 점원은 병에 걸려있었단다. 나는 너에게 그 병이 옮겨지기를 바라지 않았단다.
너의 핸드폰에 문제가 생긴 이유는, 너에게 전화를 건 그 사람이, 너에게 잘못 된 정보를 주려했기 때문이니라. 나는 너를 보호하고 싶었단다.
그리고 너의 새 마사지 의자는.. 네 집에 정전을 일으키려 하였기에 내가 그리했노라. 나는 네가 어둠 속에서 헤매길 바라지 않았단다.

그 사람이 민망해서 말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 미안해 말거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안에서 나를 믿는 법을 배우거라
나: 예 믿겠습니다. 주님!
주님: 그리고 의심하지 말거라, 네가 계획한 하루보다 내가 계획한 하루가 더 나으리라.
나: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저에게 일어난 모든 일, 감사드립니다 주님!
주님: 사랑하는 내 작은 영혼아, 오늘 뿐만이 아니라 나는 항상 너희 안에서 너희를 돌보고 있단다..

참으로 공감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감사하며, 무엇에 대해 불평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불평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출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음식이 없는 것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좀 심합니다.  이집트 땅이 어떤 땅인데요?

  • 이스라엘이 노예였던 땅
  • 이스라엘의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아들이 태어나면 뺏어서 나일강에 던지던 곳
  • 벽돌을 만들면서 지푸라기를 안주던 곳

그러나, 음식 문제에 딱 사로잡히는 순간, 음식의 노예가 됩니다.  먹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을 지배한다.  다른 말로 음식의 노예가 되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데리고 나온 이유를 알게 됩니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버지가 자식을 인도하듯이 이스라엘을 인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도한 광야는 먹고 살 것이 없는 곳이거든요.  사랑하는 아버지가 왜 그러셨을까요?

티모시 켈러 목사님:

You can get the people out of slavery quickly, immediately, but you can’t get the slavery out of the people quickly.

“백성들을 노예제도로부터 끄집어 내는 것은 빨리, 즉시 할 수 있으나, 백성들 속에 있는 노예를 끄집어 내는 것은 빨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하루아침에 노예 근성을 벗어버리고, 건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게 아니거든요.  그것은 과정적이에요. 시간이 걸려요.

화끈하게 예수 믿는 분들 계세요.  질병에서 나았다든지, 대형 사고가 낳는데 아무 일 없이 걸어 나왔다든지, 자식이 문제가 생겼는데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든지.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보다.. 믿게 되고, 교회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 분들 평상시에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면 예수 믿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분이 속사람까지 참되게 말씀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오랜 기간의 교육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음식을 가지고 가르치셨다는 것이 참 지혜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식이라는 것은 생존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것이잖아요. 자신의 밥줄이 걸린 문제에서, 즉 필수적 경제 영역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면, 그리고 행동으로 그 믿음이 드러나지 않으면, 주일날 예배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 드리러 와도 마음은 딴 데 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지 얼마 안되었거든요!  지난 시간에 그게 우리 식으로는 세례 받은 것이라 말씀 드렸어요.  하나님이 지금 막 세례 받은 초신자에게 새가족반을 하시는 거에요. 그 때,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은, (1) 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였어요. 혹은 (2) 추상적인 신학을 가르친 것도 아니에요.  신앙인의 경제 생활부터 가르쳤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부터 가르칩니다. (이건 저도 제 목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사실은 그게 진짜 하나님 믿는 거잖아요.  그것이 안되면 일관성 있게 신앙 생활이 안 되요. 일이 있으면, 주일에 예배 드리거나, 주중에 소모임 나오는 것이 힘들어요. 들쑥날쑥 해요.  그러다 어느 날 떨어져 나가요.  다시 홍해를 건너 이집트로 돌아가는 샘이에요.  먼저 필요한 것은 경제 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신 성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거에요. 또 그것을 위해 믿음으로 과감하게 순종하는 거에요.  그 때 불안에서도 자유 하게 되고, 탐욕에서도 벗어나게 되요. 그래야 신앙의 진보가 있어요. 자연스럽게 주일날 예배 드리게 되고, 그리고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요.

그것을 이해하면, 하나님이 굳이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하시면서, 특별히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지 이해가 됩니다.

  • 하나님이 광야에서 가진 목적은, 빠른 이동이 아니라, 교육이었습니다.
  • 그래서 칼빈은 이것을 가지고 광야 학교, 혹은 광야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럼 하나님이 광야에서 뭘 가르치십니까?  신명기는 모세의 회고록이며, 마지막 고별 설교입니다.  오늘 이 사건을 돌아보면서,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첫째는, 만나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가르치세요.

만나는 음식이에요. 그걸 먹어야 살아요.  그런데 만나가 어디에서 부터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와요.  만나를 통해서, 만나를 주시는 분을 알게 되요.

젖을 먹는 아이를 생각해 봅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나자마자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젖을 힘을 다해 빨아요.  젖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 젖을 먹으면서 그 젖을 주는 어머니에 대해 알게 된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생각하게 되요.  그리고 더 나아가 젖이 아니라, 어머니를 사랑하고, 간절히 구하게 되요.

이와 같이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어요.

  • 이스라엘은 남자만 60만, 여자, 노인, 어린이 합치면 150만~200만 정도
  • 그 많은 사람들이 먹으려면 엄청난 양 아닙니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게 되요.

더불어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배워요. 하나님이 하루만 능력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40년동안, 매일 같이 그 일을 행하세요.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것을 삶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 하나님이 말씀하세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과 성품을 알게 되요. 신학적인 앎이고, 이성적인 앎이에요.
  • 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시거든요. 내 삶에서 그 말씀의 역사를 경험해요. 머리로 알던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요.
  •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더 잘 이해가 되요.
  • 이 선순환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참되게 하나님을 아는 거에요.

성도들을 보면, 어떤 분은 아는 건 많은데 체험이 없는 분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체험은 있는데, 성경도 잘 모르고, 신학도 정립이 안된 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한쪽만이 강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삶이 건강한 신앙이며 신학인 거에요.  메르스 때문에 온 나라가 소동입니다. 학교가 다 멈추고, 경제적인 손실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전염병이니 다들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좀 유난을 떠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이 상황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과 또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그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신 사랑을 알 때에, 이스라엘도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시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으로 규칙을 주세요.

  • 하루에 먹을 만큼만 거두라 하세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이상 걷는다.  그 다음날 썩어요.
  • 또 주말에 안식일 전날에는 평소보다 두 배로 거두어 들이고, 안식일에는 만나 구하러 돌아 다니지 말고 쉬라고 하세요. 그러나 여전히 안식일에 쉬지 않고 나가 일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스라엘은 노예였잖아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책임 있는 행동을 배우지 못한 거에요.  하나님이 인내를 가지고 그들이 자신을 신뢰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어느 분이 고아를 입양했다고 합니다.

  • 처음엔 그 아이에게 자기 물건을 사주거나, 용돈을 주면, 이 아이가 자꾸 그걸 어디에다가 감춰 두더래요.  고아원에서는 안 그러면 빼앗기거나 누가 훔쳐갔거든요. 아직도 생각하는 건 고아원에서 나오지 못한거에요
  • 양부모가 그 아이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너의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빼앗아 가지 않는다” 말해주지만, 오랫동안 감추는 습관이 고쳐지지 않더래요.
  • 인내를 가지고 이 아이를 일관성 있게 대할 때,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아이가 양부모의 진심을 알고, 신뢰를 배우고, 그리고 행동이 교정이 되더래요.

이스라엘이 처음 광야에 들어갈 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마음이에요. “하나님 정말 말씀하신데로 하실까?”  하나님이 그것과 상관없이 신실하게 이스라엘을 대하세요.  그럴 때 이스라엘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믿게 됩니다.  그 때부터는 그들도 믿음의 삶, 순종의 삶을 살게 되요.  하나님 말씀을 전제로 삼아 자신들의 삶의 리듬을 맞춰갑니다.

특별히 생존에 관련된 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되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요.

절박한 순간의 기도에 대해 생각해 봐요.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 앞에 꼿꼿하게 기도하지 못해요. 그렇게 기도 시작했다가, 기도 도중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가 끝날 때에는 납짝 업드려요.  기도 응답 받으면서 믿음이 생기는 거에요.  또, 그 과정에서 회개해야 할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회개도 시키세요. 마음과 생각을 바꿔놓으세요.  그 때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되요.

광야 학교에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만들어 가세요.

셋째로, 그 믿음의 삶, 순종의 삶을 따라오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 극치가 안식일입니다.

“그리하여 백성이 이렛날에는 안식하였다.”

이것은 신비로운 것이다.  광야에서 안식을 누려요.   .

  • 애굽에 있을 때, 세상 가운데에서 죄의 종살이 할 때에는, 풍요로운 듯 하나, 마음도 몸도 쉼이 없었어요.
  • 또 홍해를 건너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하거나, 혹은 탐욕에 빠져요. 그 때에는 쉬는 날에도 스스로 쉬지 못하게 해요.
  • 안식일은 하나님이 외적으로, 객관적으로 주시는 거에요.
  • 그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 믿음이 있기에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 누릴 수 있어요.

하나님을 탐욕함을 생각해 봅젖을 먹는 니다.

우리의 삶에 부족함을 느낍니까?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채우시고, 만족시킬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힘써서 압시다.  그 하나님을 간절히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