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xuality Q&A

Sexuality Q&A: 3. 동성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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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해 설교해야 하는 순간이다.

사실은 이 주제에 대해 별로 설교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수많은 오해와 다툼과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특정한 문제에 대해 설교하는 순간, 마치 그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무거운 죄인 것 같은 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Fuller 신학교의 Sherwood Lingenfelter라는 선교대학원 교수님이 계시다. 선교사였고, 그리고 학자로서 선교학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행정가로서도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학장을 거쳐서, 전체 대학원 학장까지 하셨다. 학생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런데, 그가 2002년에 딸 Jennifer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딸이 부모에게 Coming Out을 한다.  딸은 처음에 그것을 친구들에게 고백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예수 믿는 몇몇 결혼한 커플에게 고백할 때 그들이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이제 다시 용기를 더 내어서 부모님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가 특별히 충격을. 그러나 부모가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행동하여 딸을 잘 받아주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쓴 편지가 있다. 그는 딸을 사랑하고 감싸야 함을 안다. 또한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심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동성연애를 지지하는 신학적 견해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딸과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동성연애에 대한 논의들을 보면, 사랑이나 배려가 없이, 그냥 내가 논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라는 전제가 있는 듯한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다. 내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며 사랑과 배려의 관계에서 동성애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죄를 지은 여인에 대한 두 대조적 관점을 보게 된다.

1. 서기관과 율법학자들: 두 가지를 이야기 한다.

  • 간음은 죄이다.
  • 그녀는 죄인이니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하다는 관점

2. 본문에 등장하지 않지만, 숨어있는 그러나 중요한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로마이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을 인정했지만, 종교의 율법을 따라 사람을 사형하는 것은 금지하였다. 로마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고, 로마의 형 집행을 하는 것만이 유효했다.  무슨 뜻인가?

  • 이 여인의 성생활은 개인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당신의 성에 대한 종교적 가치는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해야지, 그것을 가지고 이 여인의 선택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것은, 종교의 개인화를 뜻하는 것이다.

3. 예수님의 딜레마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은 예수님을 딜레마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만약에 바리새인들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사람들로 그 여인을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여야 할 뿐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불량 시민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돌로 치지 말라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의 논리대로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4. 이 상황은 이 여인에게 더 큰 두려움과, 혼돈과, 상처를 준다.

이것을 오늘날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오늘날 동성애에 대해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 율법주의적 종교적 관점에서, 동성애는 죄이며, 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심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 세속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성적지향은 개인의 것이며, 따라서 존중되어야 하지, 그것을 종교가 판단할 수 없다. 혐오라는 돌을 던지지 말라.

그 사이에서 교회와 동성애자가 껴있게 된다.

리차드포스터는 자신의 글에서 이 상황을 잘 정리해 준다.

그들의 우측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신랄한 비난이 쏟아져 들어오며, 그들의 비난자들이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을 높이 사면서도 그네들의 거칠고 정확하지도 않는 바리새적인 어투의 공격에 감정이 상해왔다.  한편 좌측으로부터는 동성애를 열렬히 찬성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비난 받는 이들에 대하여 동정어린 관심을 가져줌에도 불구하고 후자는 그들에게서 보다 더 관대하게 적용되는 성경 해석의 방법에는 그만 아연실색하게 된다.

 

창조의 원리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동성애에 대해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접근하시는 지의 원칙과 방법론을 잘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성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 제일 먼저 창조로: 즉 인간의 죄가 있기 전에 하나님이 성을 디자인한 원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두 주 전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적인 문제에 대해 답할 때에도, 결국 그는 예수님과 같이 창조의 원리로 돌아가서 거기서 부터 성에 대한 가치관을 확립하는 것을 본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과, 5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서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너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마 19:4-5)

Cf) 레 18:22; 20:13, 롬 1:21-27, 고전 6:9 딤전 1:10

성이라는 것의 창조의 원리는 무엇인가? 특별히 성경에서 말하는 원죄가 있기 이전의 창조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한 것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더불어서, 기독교인의 성에 대한 논의는 창조적 논의이기 때문에, 문화적 한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를 총괄하는 논의이다.

* 그 내용은?

  • “남자와 여자“: 창세기 1장, 2장에 계속해서 남자와 여자의 1:1의 관계에 대해 나온다.
  • “한 몸“: 육체적인 연합 뿐 아니라, 전인적 연합이라는 것, 따라서 평생의 헌신된 언약적 관계를 뜻한다.

이 경계선을 잘 지킬 때 성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흘러들어온다.

  • 창세기 1장에서는 성은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 위에 충만하라.” 즉,  집단적인 관점에서 번식을 위한 것이 나온다.
  • 창세기 2장에서는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즉, 개인의 만족과 자기 완성을 위한 것

문제는 언제 생기는가?  하나님이 원래 디자인한 목적에 어긋나거나, 혹은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넘어가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간 것이다.

음식의 예를 들어 설명하자
음식을 통해 생명이 넘치도록. 그리고 즐기도록 하셨다.
불량식품이 무엇인가? 그 음식은 즐길 수는 있다. 그러나 생명을 헤하는 것이다. 음식이 주는 목적에 어긋난 것이다.
탐식이란 무엇인가? 음식 자체는 몸에 좋고, 또 즐거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탐식은 먹어야 하는 경계선을 넘어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죄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래의 디자인에서 벗어나게 될 때 대가를 치루게 되어있다.

동성애를 기독교에서 왜 죄라고 하는가?
하나님이 원래 성에 대해 디자인한 목적과 경계선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동산의 다른 실과는 다 먹어도 된다고 하셨다.하나만 먹지 말라고 하셨다.   경계선을 그은 것이다.
그러나 그 먹지 말아야 하는 과일을 보고 먹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것을 따먹고 말았다.
그 순간에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이것만 따먹으면 행복해 질 것이다. 그것을 우상이라 한다.
그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의 욕망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따라서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질 뿐 아니라, 신기하게도 사람끼리의 관계도 멀어졌다.

인간의 성적인 욕구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서,
나의 개인적 성적 만족을 위해,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목적과 경계선 밖으로 나갈 때에, 그것은 죄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 동성애에 대한 여러구절이 있다.
이 구절들을 보면, 창조의 원리로 돌아가 그것을 기준으로 지금 겪고 있는 현상에 대해 비평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게 된다.
각 구절이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때어서, 상황만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일관성을 깨는 해석으로 좋지 않다.

 

Neither Condemn, Nor Condone

Condemn은 정죄함이라는 뜻이다.
Condone은 아무일도 없는 척 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다 피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정죄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성을 창조의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하거나,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을 죄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정죄—즉 너희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지 않는다.

요3: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2.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이 정죄 받지 않으니, 가서 성을 자신이 원하는 데로 사용해도 된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고 하신다.
이전에 자신의 욕구대로 사용했다면, 이제는 그녀가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기를 원하신다

워싱턴 한인교회 김영봉 목사님이 이것을 잘 정리해 주신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이 말한다.

…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10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11 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많은 경우에 시험을 통과하는 기준처럼 사용되었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은 구원을 못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을 그렇게 사용하면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술 취하는 사람들은?”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사도바울이 말한다. 11절: “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 앞에서, 아무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죄를 죄라고 말해야 한다.
    • 그러나, 그것은 정죄함이 아니라, 죄에서 자유하여,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로 창조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하여주신다.

궁극적 여정의 동반자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마지막에 이 여인과 함게 남은 것은 어느 쪽도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었다.
모든 사람이 떠나가도 마지막까지 옆에 함께 있어주는 자가 되어주는 것이 교회가 해야할 일이다.

Richard Foster는 동성애에 대한 3가지 종류의 답을 정리한다

  • 실행: 그냥 동성애적 성적 지향을 그대로 사용하라.
  • 변화: 동성애적 성적 지향에서 이성애적 성적 지향으로 변화하라.
  • 통제: 자신의 동성애적 형태를 통제하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통제하며 독신으로 살 수 있다
  • 1. 실행에 대해서는 성경적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다.

    2. 변화에 대해서는 많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이 성적지향에 변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변화의 사례가 있다.
    텍사스의 The Village Church라는 곳에서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사역하는 Rick이라는 목사님의 간증을 들어보면 자기 자신도 어릴 때와 10대 때 동성애자였다. 그것 때문에 자살 시도를 두 번이나 했다.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분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알게 되었고, 그리고 자신의 성적 지향도 이성으로 변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실제로 결혼하여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더불어서, 자신이 사역하는 곳에서 같은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3. 통제에 관해서 Henry Nouwen의 예가 있다. 그는 공식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적 성향을 인정하거나 논의한 적이 없지만, 가까운 몇몇 사람이 그가 그러한 성향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통제가 아닌 2가지 선택이 가능했다. (1)자신의 서원을 포기하고, 실제로 동성애를 쫓아가는 것. (2) 공적으로는 사제의 삶을 살고, 사적으로는 동성애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둘 다 선택하지 않았다. 독신으로 살면서 사제로서의 삶을 살기로. 그리고 평생 그것을 지켰다.

    동성애는 아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류의 비성경적인 성적지향과 싸우고 있다. 또한 성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면, 또 다른 종류의 죄와 싸우고 있다. 사람들마다 자신이 취약한 죄의 부분이 있다. 완전히 변화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 그러한 죄의 성향에 대해 싸우며 살아가야 한다.

    지난 주에 “궁극적 여정"을 함께 가는 사람들에 대해 말했다. 상대방이 완벽하기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그의 삶에 나를 투자하고 동참하는 자. 그리고 상대방도 나의 인생 여정에 참여하라고 초대하는 자. 그것이 가정이고 교회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니까

Sexuality Q&A: 2. 결혼 vs. 나 혼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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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큰 이슈 중에 하나는 결혼의 문제이다. 결혼이 줄고, 싱글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젊은 세대가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자기 성취를 위해 공부하거나 직업에서 자리를 잡는 기간이 늦어져서 이기도 하다. 특별히 여성들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여성의 결혼 연령이 점점 뒤로 늦춰지고 있다. 또, 그 밖에 다른 이유들로 싱글들이 나오게 된다.

결혼과 싱글은 간단하지 않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나오게 된다. 앞으로는 싱글, 싱글맘 등을 위한 교육과 주거 형태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며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이렇게 급변하는 가치관과 제도적 상황에서 사회 전체적으로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옛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새로운 문제에 대해 계속적으로 성경적-신학적 적립이 되어나가고, 실천 신학적인 면도 발달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되고 있지는 않는 듯 하다.

교회 안에서 보는 것은 이런 것이다. 예전에는 직장을 잡고 또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법적으로는 20살이면 성인이 되지만, 그래서 청년부를 만들고 그들로 결혼할 때까지 완전한 어른으로 취급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점점 취업의 시기가 늦어지고, 또한 결혼의 시기가 늦어지면서, 결혼을 안했다 뿐이지, 정말로 성인이 되었지만, 청년부를 탈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성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오늘은 고린도전서 7장을 중심으로 바울이 가지고 있는 결혼관에 대해 세계관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혼에 대한 세계관을 살펴보자.

둘 다 “자아 실현"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1.
전통적 가정관: 가정 중심적 사고이다.
개인의 명예, 개인의 영광, 개인의 성취라는 것은 가문보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가문이 번창하고, 가문이 영광을 누려야 한다.
따라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했다.
사회적, 철학적으로는 자기의 위치가 없는 것이고, 자기 완성이 안된다.
실질적으로 미래도 없고, 누가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지도 않고, 노후에 공양해 주지도 않았다.

결혼은 당연히 하는 것. 필수이지 선택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모두들 결혼을 했고,
청년들 대화를 해보면 우리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젊은이들을 3포세대라고 한다.: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좌절이 된다. 결혼을 해도, 그 안에 사실은 학자들이 말하는 “억압”이라는 것이 있다. 그 안에도 갈등이 있고, 힘들고, 상처도 받는다.

2.
그러나 오늘날 젊은이들은 그렇게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가문 보다는, 개인이 중요. 따라서 개인의 만족, 완성, 표현으로서의 결혼
그 뒤에는 로멘스와 사랑이 중요한 테마가 된다.

Ernest Becker. 인류의 역사상 오늘날 우리 사회만큼 “진정한 사랑"을 찾는 것을 강조한 사회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 중에 두 가지

첫째, 오늘날 만큼 비인간화 된 때도 별로 없다 사람의 생명의 가치가 땅 바닥에 떨어졌다. 우리 나라 젊은 세대를 생각해 보세요: 기대도 많이 받고, 공부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해요. 그러나 돈은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어요. 자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럴 때,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참된 사랑”을 찾음으로 확인하려 한다는 거에요. 역사상 romanc와 참된 사랑에 대해 이토록 강조한 적이 없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되면서 나의 가치를 발견하기가 힘들어졌다. 나의 가치와 의미는 나보다 더 큰 의미, 내가 믿고 맡기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얻을 수 있어요. 신앙적으로 말해볼까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계시고, 나에게 주신 소명이 있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걸고 달려갈 것이 있어야 해요. 사회나 정치적으로 보면: 전쟁이 있을 때, 평화를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어야 했어요. 흑인들이 차별을 받을 때, 인류 평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어요.

문제는 젊은 세대가 하나님을 떠났어요. 젊어서는, 특별히 대학 졸업하기 전까지는, 노는 게 좋고, 또 자기가 원하는 것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일에 집중한다. 내 원대로 안될 때 돌아와요. 사회적으로도 무언가 자신을 걸만한 큰 일이 없어졌어요.

그것에 대한 솔루편이 로멘스에요: 하나님이 안 계시니, 이제 자기 영광을 연인에게서 찾는 거에요.

Becer가 말해요. “sex, 로멘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만족할 길이 없다.”

결혼이라는 것이 개인적 자아 실현과 관계가 있다. 문제는, 그렇다면, 로멘스나 사랑에 너무 큰 가치를 두는 순간 사랑이나 결혼에 실패하면 너무 큰 상처를 받는다.

궁극적 가족

바울의 결혼관을 살펴보자

29 …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여기서 멈추지 않아서 다행이다]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이것은 가정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가정을 부인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내를, 가족을 소중히 여지고 성실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정서적인 것, 자신의 자아 성취, 그리고 자신의 소속을 지금 현세에 다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왜?: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이 문장의 시제는 현재형이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의 형체가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오셨다. 처음 오셨을 때,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후에 성령을 주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하게 하셨다.  그러나 아직도 구세대의 죄와 사망이 계속된다.  우리는 이 두 시대가 겹쳐져 있는 상태에서 살고 있다.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장례의 사랑과 장례의 은혜를 미리 맛보게 해 주신다.  그 미래에 대해 미리 맛보게 해 주실 때, 우리를 이 세상의 것들에서 자유하게 된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 말씀하신다.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30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무슨 말인가?  지금 결혼을 하던지 말던지, 아이를 갖던지 그러지 않던지, 가족을 꾸리든지 아니든지, 그것은 선택적이라는 것이다.  왜?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가족이 될 것이고, 그것을 지금 미리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미리 맛보는 것이 교회이다.  교회에서 서로를 형제요 자매라 부르는 것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진짜 형-동생이 되고, 언니-동생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이것에 대해 상당히 진지했다.  예수살렘 교회의 경우는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 공동체에 기부하고,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식이 없는 나이 드신 과부들을 돌봤는데, 그들은 정말로 그들을 가족으로 대한 것이다.  때로는 그 안에 주인과 노예가 함께 공동체에서 형제 자매라 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헬라 사람과 유대 사람이 함께 섞이기도 했다.  이것들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혁신적인 것이었다.  왜?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됨을 미리 맛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Stanley Hauerwas는 Duke University의 교수이다.

장래의 가족에 대해 맛을 보고 소망을 둘 때, 우리는 자유하게 된다.
전통적인 보수적 사회에서는 가족을 우상화 했다. (가족은 소중하다. 우상은 아니다) 기독교인의 소망이 그것을 막아준다.
또한 오늘날 현대가 급변화하면서 성과 결혼, 가족에 대해 다른 가치관이 생기고, 또 결혼하기 어려운 사회적 상황이 있다.  그것또한 궁극적 가족관을 통해 혁신될 수 있다.

궁극적 여정

28 … 그러나 그들[결혼한 사람들]이 살림살이로 몸이 고달플 것이므로, 내가 아껴서 말해 주는 것입니다.

결혼은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 만이 아니다.  결혼은 개인의 만족과 자기 성취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결혼은 좋은 것이지만, 매우 길고 어려운 여정이다.

내가 있다.  예수를 믿을 때,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내 안에 심겨졌다. 마치 겨자씨와 같이 작다. 그것이 참된 자아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와 동행하면서, 이 씨앗이 점점 싹이 트고 자라난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두려움일 수도 있다.  정욕, 자만심, 자랑 같은 죄이거나, 혹은 분노 상처일 수도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나,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근심일 수도 있다.  잘못된 습관도 있다.

참된 자아가 성장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많은 실패와, 회개와, 은혜가 필요하다.

그 뿐 아니라, 결혼을 했다면, 나 자신의 문제 뿐 아니라 상대방과의 갈등도 있을 것이다.  결혼은 그러므로 기나긴 힘든 여정이다.

32 나는 여러분이 염려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33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쓰게 되므로,
34 마음이 나뉘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나 처녀는,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려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씁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을 쓰는 것이니 기쁜 것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실제로는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야 하는 것임을 뜻하기도 한다.

결혼에 대한 도덕적 의무라는 접근과, 결혼과 가정은 우선적으로 개인의 행복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자아 성취적 윤리 둘다 대등하게 파괴적이다. … 그것은 내가 결혼하기에 꼭 적합한 사람이 있으며, 우리가 잘 살펴보면, 그 적격자를 찾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늘 잘못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절대로 알지 못한다. 혹시 맞는 사람을 찾는다 해도, 조금만 지나면 그 사람은 변할 것이다. 결혼이라는 것은, 그토록 거대한 것이기에, 그 속에 들어가면 변하지 않고 이전과 똑같이 남아있을 수 없다.
– Stanley Hauerwas

따라서, 결혼이라는 것이 나에게 잘 맞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Stanley Hauers는 결혼의 큰 도전은 “당신이 결혼한 그 낯선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나이드신 목사님이 말씀하시더래요.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내 아내는 다섯명의 다른 사람과 살았다. 그리고 그 다섯명은 나였다.”

바울이 말하는 데로, “살림살이가 고달프므로”인 것이다.

결혼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다.
이미 완성된 완전한 조각상을 찾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대리석 덩어리를 찾는 것이다.

지금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그의 미래. 하나님이 그를 빚으셨을 때의 그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다.

팀 켈러 목사님이 결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미래가 기대가 됩니다. 당신이 그곳에 들어가는 데 나도 한 몪 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하는 여정에 지원합니다. 내가 참된 자아를 찾는 여정에 당신도 지원하시겠어요? 어려운 길이겠지만, 나는 거기 도달하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깨끗하고, 거룩하고, 티나 주름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결혼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긴 여정이다.  그것을 이해할 때, 결혼 생활이 사실적이면서도, 기쁨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결혼하면 마냥 행복해야 한다 생각하면서, 별로 유지-보수가 필요 없는 사람, 늘 나에게 만족을 주는 사람을 찾는다면: 절대적으로 실망할 것이다.

싱글들에게는?  앞에서 말했듯이 교회가 가족이 되어주어야 한다.  다른 말로, 싱글이면, 이러한 자기를 찾는 여행에 각개 전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가족이 되어주어서, 함께 서로의 여행에 참여해 주고, 투자해 주는 일들이 필요하다

중세에 수녀원이 늘어난 이유가 있다.  귀족의 자제들 중에도 수녀원에 간 여인들이 많다.  그 실질적 이유 중 하나는 적당한 배우자를 찾기가 힘들거나, 또 결혼이라는 것을 치룰 비용이 부족해서이다.  그럴 때, 그들이 수녀원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궁극적 연합을 추구하며, 영성에 집중하였다.  더불어서, 그들은 사회적인 기여도 많이 했다. 고아원도 수녀원에서 시작하였다.

동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실제로 친하게 지내는 어느 30대 싱글이 나에게 물어본 말이다.
왜 물었을까요? 보니까 여자 친구가 있어서 물어본 것이다. ㄴ혼하려 하면 사실은 비용도 많이 들고, 그런데 그럴 돈도 없고
많이들 말하는 것이, 주변을 보니 결혼은 정말 잘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혼자 살자니 외롭고

내가 물었다. “동거하다 헤어져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후회 안할 자신 있다는 대답을 못하고 그가 우물쭈물 하더라.

동거에 대한 이유를 들어보면, 마치 자동차 시승식 하는 것 처럼 생각이 든다. 타보고 마음에 들면 사는 것이다. 큰 투자를 하는데, 후회를 안하지. 결혼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바로 그게 걸리게 된다. 이것은 언약이 아니라 소비의 입장인 것이다.
그 생각 뒤에는 상대방에게 헌신하고, 그의 궁극적 자아를 찾는 여정에 관심을 갖고 나를 투자하고 내어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것으로 생각하면,헌신된 관계를 전제로 하고 같이 살아야 하겠다. 살아보고 결정한 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상대방을 헌신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실제로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 심리학자들이 연구해 봤더니 동거하다 결혼한 커플이 이혼률이 더 높더라고 한다.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면, 동거하지 않는 것이 낳고,어짜피 결혼할 것이라면, 혼인신고 하고, 그리고 식은 간단하게 가족과 증인될 친구들만 모시고 해도 된다. 필요하면 내가 주례해 주겠다. 교회 옥상에서 결혼하라. 혹은 관공서에서 몇십만원에 웨딩홀을 빌려준다. 그런 곳을 알아봐도 좋다.

궁극적 연인

마지막으로, 결혼과 싱글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궁극적 연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 궁극적 가족, 궁극적 여정의 시작점과 끝점에 계신 분: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 하시고 성령을 주심으로 나를, 교회를 자신과 연합하게 하신 분.
그리고, 나의 인생의 여정에, 교회의 여정에 평생에 걸처 투자하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분
마지막에, 교회를 거룩하고 흠없고 티없는 자신의 신부로 삼으시는 분.

그 분이 우리의 참된 만족이 된다.
그 분이 우리의 궁극적 완성이 된다.

그것을 믿고 오늘 그것을 맛보며 사는 삶.
그것이 영원한 삶.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지난 주 본문에서 6:17에 이러한 말씀이 나온다.
성적인 연합은 궁극적으로 주님과의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우물가의 연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여인과의 대화를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1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그 때 그 여인이, 15 그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16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17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18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

이 여인은 성적인 삶에서, 그리고 로멘스로 부터 인생의 만족을 찾으려고 했다.
사람과의 사랑에서, 그리고 로멘스에서 물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녀의 참된 사랑이 되지 않으면, 그녀는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궁극적 연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왜곡될 것이다.

예수님이 참된 사랑이 되고, 예수님에게서 물을 얻지 않게 되면 둘중에 하나가 된다.

첫째, 로멘스에 대해 절박할 것이다.
사랑을 찾는 데 마음을 다 쏟아 부을 것이다.
늘 사랑을 찾으며, 절박하게 찾으나, 늘 잘못 선택한 사람과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혼한다면, 상대방에 대한 기대로 인해 그 사람으로 질식하게 만들 것이다.

둘째, 반대로, 로멘스에 대해 사랑에 대해 두려워 할 것이다. 늘 피해 다닐 것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해 늘 냉소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예수님을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라. 그러면, 또한 참된 사랑을 찾을 수 있다.
바울도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한다. 교회는 신부이고, 예수님은 신랑이 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