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3:1 “사데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계3:2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나는 네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계3:3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계3:4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이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계3:5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
계3:6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아테네에 가면 판테온(만신전)이 있다. 거기에는 각양각색의 신들이 모여있다. 이 신들은 다양한 공공 영역을 상징한다. 아프로디테(비너스): 아름다움. 아레스: 전쟁의 신. 아르테미스(다이아나): 다산과 풍요. 헤파이스토스: 대장장이 기술
팀 켈러. Counterfeit Gods. 거짓된 신들의 세상에서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신들을 모신 신전이 없지만, 대신에 우리는 고층건물의 사무실, 미장원, 헬스 클럽, 촬영장, 혹은 스타디움이 마치 신전과 같이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프로디테에게 무릎 꿇고 절하지는 않지만, 오늘날 많은 젊은 여성들이 아름다운 몸매를 위해 희생제물을 바치며, 그로 인해 우울증이나 거식증에 걸린다. 우리는 아르테미스 신[풍요의 신]에게 향불을 키지는 않지만, 돈과 자리가 삶의 모든 것이 될 때에는, 아이를 희생하고, 가정과 공동체에 불성실하게 된다. 아름다움, 힘, 돈 성취와 같은 신들에게 희생을 바치고, 그것을 통해 좋은 삶의 축복을 받고, 재앙을 피하고자 한다.
오늘 성경에 버가모 교회가 나온다. 버가모는 사탄의 보좌가 있는 곳, 즉황제 숭배의 메카이고, 거대한 제우스의 제단이 있던 곳이었고, 예수 믿기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예수님은 그 교회의 “신실된 증인 안디바”에 대해 말씀하신다. 황제 숭배를 강요받던 시기에, 순교자라는 신실한 믿음의 기반 위에 세워진 훌륭한 교회가 버가모 교회이다. 그러나 훌륭한 신앙의 전통이 있는 교회가 어느새 변질되어 예수님은 “나무랄 것이 있다.”고 말해야 했다. 우상숭배에 바친 음식을 먹고, 음행을 행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
우상: 식욕과 성욕에 관한 문제
먹는 것. 남녀의 사랑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 만드시고 아담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외로울 때 함께 할 사랑하는 여인을 주셨다.
먹는 것. 남녀 간의 사랑: 본능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본능에 충실한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좋은 것이, 절대적 가치를 차지해서 그렇다.
그 순간에 내가 식탐에 잡히면서, 고기를 먹기 위해, 내 신앙의 타협을 해도 상관없고, 내가 하는 일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시험에 들거나 상처받을 것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된다
내 성욕을 채우는데 사로잡히면, 수치심을 잃을 뿐 아니라, 맺어서는 안될 관계를 맺어서 큰 피해를 준다.
우상이라는 것에 대한 오해가 있다. 우리는 우상을 나쁜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다. 좋은 것이다. 좋은 것이 절대적인 것이 된 것이다. 다른 말로: “그것만 있으면~”이라 말하는 것. 그게 있으면 평화롭고, 행복하고, 안전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순간 분별력이 없어진다.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타협하고 다른 가치들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끝이 좋지 않다.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가 최근 중앙일보 칼럼에 글
오늘날 대한민국에 최대의 위협은 북한도 경기침체도 특정 정치인의 행태도 아니다. 가장 큰 위협은 문화적 데카당스(decadence·퇴락)의 확산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개개인은 민족의 미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들은 별생각 없이 음식, 술, 성적 쾌락, 휴가와 스포츠에 탐닉한다. 단기적 만족이 인생 목표가 됐으며 희생의 가치는 사라졌다. 이런 게 전형적인 퇴락이다.
시장 수요를 창출하려는 잘못된 노력 때문에 우리가 인간 본성의 원시적인 힘들을 풀어놓았다는 게 비극이다. 그 힘들은 전통 한국 사회에서 요구됐던 합리성, 자제력, 마음 챙김(mindfulness)을 대신해 우리 젊은이들에게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단 몇 분만 텔레비전을 봐도 오늘날 한국을 위협하는 기괴한 문화적 퇴락을 목격할 수 있다. 생각 없이 무절제하게 꾸역꾸역 음식을 먹어 가며 오감을 만족시키는 장면이 끝없이 반복된다. 20여 년 전에는 ‘포르노그래피’라는 이유로 금지되었을 차림새의 여성이 광고에 나온다.
얼마간 상품을 팔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전략은 모든 수준에서 가버넌스 기반을 약화시키는 도덕적 퇴락을 초래한다. 이제 국가의 복지, 안보나 가치와 무관하게 되어 버린 정책은 부와 권력을 쌓는 기회로 전락했다. 사회 전체를 이러한 퇴락이 차지했다면 우리는 경제 정책이나 기술 정책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 무슨 말인가? 쾌락과, 물질과, 권력이라는 것 나쁜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 순간, 어쩌면 그토록 바라는 것을 얻을 수도 있겠다. 그 순간은 짜릿하겠지.
그러나 평화나, 행복이나, 건강을 기대하지는 말라
* 예수님: 회개하라하신다
우상은 단순히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을 예수 아닌 다른 것에 빼앗긴 것
다시 마음을 예수께로 드려야 한다
* 우리 사회의 기형적 쏠림 현상이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먹을 것: 먹방과 극단적 다이어트의 모순적 결합: 맛있는 건 다 먹으면서, 몸매는 여신이 되고 싶어한다. 유럽의 귀족 문화: 파티에 깃털을 가지고 다녔다. 맛있는 음식 먹고 토하고 또 먹고. 오늘날은? 깃털을 안 가지고 다니지만, 소화제. 고무줄 바지를 지참한다. 동시에 역으로: 살빼는 약. 살빼는 클리닉을 간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 탐욕을 위해 먹지 말고, 주님이 주신 음식의 목적: 건강과, 식사 중의 대화를 기준으로 먹으라. 주님이 나에게 주신 자기 양: 미리 정하고 딱 그만큼 먹어라. 식전 기도와 식후 기도: 먹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 맛있는 거 주셔서 감사합니다. 디저트 포함 3접시 먹을께요” 먹은 후에: “잘 먹었습니다.” 기도하라.
*사교육 지수: 전체 가계 수입에 비해 얼마나 사교육비의 비율이 높은가? 아이들을 위해 돈 쓰느라, 기둥이 뽑히는데, 아이들이 행복하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2011년에 15세-19세에 사망한 청소년이 1003명이다. 그중 사망 원인 1위가 자살. 317명. 그리고 그 자살의 53.4%는 성적과 진학 때문이었다.
“공부해서 남주나?”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공부하게 해야 한다.
어느 목사님. 입시철에 수험생들 어머니 모여서 기도하는데 어느 집사님이 와서 특별한 기도 요청을 한다. “우리 딸이 이번에 시험을 보는데, 시험에 떨어지게 기도해주세요. 꼭 떨어져야 합니다.” “왜 그러세요?” 질문한다. “우리 아이가 예쁜데다가, 유치원때부터 고3까지 1등만 했습니다. 얼마나 똑똑하고 잘 났는지 부모도 우습게 봅니다. 아버지가 뭐라 하면 무식하다고 무시하고, 엄마가 하는 소리는 아에 안 듯습니다. 이번에 꼭 떨어져야 합니다. 안 떨어지면 큰일 납니다. 저건 시집도 못하고, 시집 갔다가도 못살 것입니다. 교만하고, 욕심 많고, 저 잘난줄 알기 때문에 꼭 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기억하고 떨어지라고 기도 했고, 정말로 떨어졌데요. 일주일동안 울고불고, 밥도 굶고 난리가 났데요. 대신에 겸손해졌데요. 그 아이가 커서 결혼 주례해 달라고 찾아왔답니다.
* 마음의 중심: 예수님에게 두세요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의 검이 나온다. 내 마음에 욕심이 잉태된 것을 인정하고, 우상의 노예가 된 것을 인정하고, 오직 말씀이 내 마음과 생각을 인도하도록 하라. 우상을 버리는 것. 내가 버리지 못한다. 하나님이 은총적 계기를 주셔야. 어려움이 있을 때 오히려 주님께 나아오자.
“내가 욕심을 버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뭐라도 좋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시련이라도 감당하겠습니다.” 고백해야 한다.
다른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바라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인 것이다. 그럴 때 오히려 참된 자기를 찾고, 또한 영생을 누린다.
2절이 마음에 든다. 갑옷을 입은 소나무: 바람과 서리를 맞아도, 그것으로 인하여 흔들리거나 상하거나 마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푸른 기운을 뿜는 것
그걸 기개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 큰 일이 벌어졌다. 2017년이 쉬울 것 같나, 어려울 것 같은가? “바람과 서리가 잦지 않을 해”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기개가 필요하지 않은가?
우리 모두가 다 고난을 겪는다. 어느 쪽을 원하는가? 꺾이고 포기하는 사람이 되기 원하나? 아니면, 그것을 통해 오히려 강인해지고, 또 신앙인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터워지길 원하나?
오늘 본문에 서머나 교회는 그야말로 바람과 서리를 맞는 교회이다. 현재의 고난과더불어 가까운 미래로 예측되는 어려움이 있다.
1. 현재. “당한” 것들: “환난, 궁핍, 비방”
환난: [박해] 힘에 관한 것. 내가 힘이 없어서, 힘있는 사람이 나를 해꼬지할 때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당하는 것
궁핍: 가난. 단순히 돈이 없는게 아니라 신앙으로 인해 억울하게 빼앗기고 압류당해 가난해지는 것을 뜻한다
비방: 욕하고 저주. 악플. 명예/자존심을 훼손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 중 하나만 있어도 사람이 꺾이기 마련이다. 놀라운 말이 나온다. “사실 너는 부유하다” 앞의 가난은 외적인 것이라면, 부유함은 내면에 관한 것이다. 이 세가지 어려움이 동시에 들이닥쳤는데 여전히 마음에 여유가 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넉넉히 이기느니라” 말하는 것과 같다.
2. 한술 더 뜬다. 당한 일 뿐 아니라, 당할 일도 있다: “장차 받을 고난”이 있다. 예측된 가까운 미래의 어려움: 감옥과 죽음으로 나를 위협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시험 들었습니다” “겁나서 못하겠어요”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 다음에 놀라운 말이 또 나온다 “죽기까지 충성”한다: 죽으면 죽었지, 늘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려움에서도 마음에 여유가 있고, 위협가운데에도 변함이 없는 사람을 놓고 오늘 본무에 “이기는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무엇이 고난 받는 자를 승리자로 바꾸는가? 그 승리의 비결을 배워야 하겠다. 그 비결대로 살아야 겠다.
본문에서는 관점을 바꾸라 말한다. 같은 일을 놓고도, 어느 자리에서 보느냐,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오고, 따라서 다른 결론으로 가게 된다. 같은 사건을 만나도 관점에 따라 망하기도하고, 흥하기도 한다. 같은 사건은 놓고 절망하기도 하고, 소망을 갖기도 한다.
* 첫번째는 관점을 바꿔서 시간을 넓게 보라고 말한다.
– 장차: “μέλλω “about to” 임박한 미래. 곧 다가올 사건.
– 그럴 때,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 그 “장차”: 예측된 사건이 삼중적이다
1. 장차 고난 당할 거에요. 사탄이 믿는 자를 감옥: 그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2. 그런데 주님이 말씀으로 또 하나의 “장차” 일어날 것을 보여주신다.
– 그 환난의 기간이 “열흘”
그 다음엔? “장차” 풀려날 것이다.
– 고걸 알면 감옥에 있을때 마음 가짐이 다르다
3. 동시에 “장차”는 종말론의 용어: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본문. 예수님이 처음이고 나중: eschaton. 종말
– 지금은 사탄이 성도를 감옥에 던진다.
– 계시록 20장에 마지막에 천사가 사탄을 쇠사슬에 묶여서 감옥으로 던진다.
– 하나님의 심판
질문: 무엇을 집중적으로 봐야 이길 수 있겠습니까?
1. 감옥에 갇치는 것은 아니다
2. 지금 들어가도 내 눈은 열흘 후의 하나님의 석방을 봐야 한다.
3.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봐야 한다
* 미국에서 공부하고 사역하면서 애 3을 낳았다. 게다가 남자애가 둘이었다. 나도 고생했지만, 아내도 고생 많이 했다. 한번은 교회에 한 강사 목사님이 오셔서, 교역자들이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그 분이 우리 식구를 봤다. 내가 너무 불쌍했나보다. “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갑니다“라는 말을 여러번 해주신다. 그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아요.
* 이것을 아는 사람의 태도를 한마디로: 기다림이라고 한다. 승승장구도 환난도 지나갈거에요: 교만 하지도 않고 낙심하지도 말라. 그 기다리는 기간에 특별히 할 있는 일은 없다. 그러나 무기력이 아니다. 적극적인 기다림이다.
* 둘째: 기다림에 대한 고백. “이것이 나에게 필요합니다”
-아브라함: 아들을 낳으리라 약속을 받고 25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걸 통해 불씨가 꺼져 죽은 것 같은 사람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생김
– 야곱: 라헬과 결혼하려고 7년을 기다려야 했고, 7년을 추가로 무임 노동해야 했다. 그걸 통해 원하는 것을 거짓말을 해서라도 빼앗던 그가, 편법을 사용하지 않는 정직한 인격. 하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인격으로 사람이 변한다
– 모세: 이집트에서 도망쳤다.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서, 자기 꿈이었던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는 데까지, 40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걸 통해 “욱!”하던 다혈질의 모세가, 그 많은 불평과 불만과 비방을 듣고도 겸손한 “온유함”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신실하게 40년을 이스라엘을 인도한다
–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을 기다려야 부활하셨다. 부활의 증거 중 하나가 무덤에서 3일간 계셔서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먼저 보여야.
환난가운데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나를 만지고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 기다림이 나에게 필요하다.
* 어려운 일을 당한 성도들을 기도로 초대할 때가 있다.
–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 좋고, 그게 안되면 다른 장소라도 정해서, 작정하고 기도하라
– 3일이면 3일, 일주일이면 일주일, 40일이면 40일
– 그 시간 쉽지 않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변화와 성장의 기회
– 기다림을 기도로 채우는 사람이 승리한다
2. 두번째는 시간뿐 아니라 사건을 보는 관점을 바꾸세요.
* 시험을 당한다: 수동태. Be tested.
– 수동태로 쓴 이유가 있다.
– 신적 수동태: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하셨다” 대신에 “내가 이 일을 당했다”라는 수동태의 표현을 사용한다
– 시험을 당했다: 표면적으로는 마귀가 시험
–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럼 마귀랑 비등비등해서 싸우는 것인가?
– 아니면 하나님이 못되서 시험을 들게 내버려 두는 것인가?
– 아니다.
“열흘”” 그 열흘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은 사탄 위에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 악이 판을 치는듯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 사탄의 교활함이 하나님의 지혜를 넘지 못한다: 악을 악으로 드러나게 하시고, 하나님은 신비로운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빼앗기 위해 흔들어 댄다.
– 하나님은 성도들의 중심에 믿음이 있는지를 들여다 보신다.
* 중세의 영성가인 십자가의 요한.
– 영적 어두움에 들어가는 때에 대해 말한다
– 시험에 들때 드는 3가지 증상
i. 우상숭배(혹은 영적 간음):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디에서 만족을 찾고자 하는 것.
ii. 분노:
–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화가 올라온다
– 자기 자신에 분노
– 부모에게, 형제에게, 그 사람에게
– 하나님을 향한 분노
– 분노: 사람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을 수 없는 감정.
iii. 혼돈: 시험 당할 때 혼란스러워서, 바른 결단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단을 하지 못한다
– 지혜로운 사람들이 바른 조언을 하여도 그 조언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한 조언을 듣는다.
– 바른 길을 모르며, 약속을 한 후에 번복한다.
1) 우상숭배, 분노, 혼돈: 이 3가지를 통해, 우리는 슬픔과 비참함을 느낀다.
2) 그러나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신다.
– 비참함을 통과하면서, 하나님 아닌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고 한 행위를 청산하고 참 하나님만 사랑하게 된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 실화
– 그 교회 한 자매: 암에 걸렸는데 수술해도 생존 확률이 50:50.
–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물어봤다. 수술해야 할지 말지.
– 목사님이 “내가 어떻게 말하는가? 네가 기도하고 결정하라.”
– 그 처녀가 기도하고 와서 “절반 확률이라면 안하겠습니다.
– 대신에 나를 위해 주일마다 기도해 주세요.”
– 목사님이 기도했다. 그리고 낳았다.
– 그런데, 2년후에 다시 재발한다. 역시 수술해도 확률이 50%. 그 때 목사님이 묻는다. “하나님이 아직도 너를 사랑하는 것을 믿는가?” 그 처녀가 “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날 위해 죽으신 사랑을 내가 믿습니다.”
이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건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한 성도의 태도: 충성
* “죽기까지 충성하라
– 충성: “억지 춘향”. 윤리적 충성이 아니다
– 충성이란 다른 말로 신실함. 변함 없음.
–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 / 신뢰를 간직하는 것
– 왜요?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을 알고, 체험하고, 충만해서
–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만하며
–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을 알기에
– 나도 그 하나님의 신실함을 충성되이 붙잡는 것이다.
* 본문에서도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11절)
* 성도들의 신실함의 능력: 신비롭게도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이 드러나게 된다.
–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다
– 우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
* 요한계시록이 기록된지 약 60년후에 서머나에 한 순교자 온다
– 서머나의 주교였던 폴리캅
– 그는 교회에 박해가 있던 시기에 밤낮으로 사람들과 교회를 위해 기도하던 중에, 자기가 베던 베게에 불이 나는 환상을 본다
–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나는 산채로 화형에 처해져야만 한다”고 예언과 같이 말함
– 그리고는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을 오히려 환영하여 음식으로 대접하고, 잡혀가서 재판을 받는다.
– 지방 총독이, 예수를 부인하고 로마 황제에게 재물을 드리라는 회유한다. 한편으로 그러지 않으면 짐승에게 내 줄 것이고, 화형할 것이라 협박한다.
– 폴리캅이 거절하면서 “86년 동안 나는 그분의 종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분은 내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의연하게 화형을 선택한다.
– 그것을 목격한 사람이, 그 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교회들에게 보낸다. 그걸 보고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신실하게 된다.
하이델베르그 소요리문답 제1문
문: 삶과 죽음 가운데서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그것은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과 영혼이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사실입니다.
– 그는 자신의 귀중한 피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완전히 지불하셨으며,
– 마귀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 그는 또한 나를 지켜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내 머리에서 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고, 실제로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도록 하십니다.
–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을 통하여 나의 영생을 확신시키시며,
– 이제부터 내가 그를 위하여 살기를 전심으로 원하고 또한 준비되도록 만드 십니다.
2:1 “에베소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신다.
2:2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2:3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냈으며, 낙심한 적이 없다.
2: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2: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2:6 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2: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
사랑: 상대방의아름다움을보는것
밀턴, 실낙원IV권 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이브를 창조하고, 아담에게 데려가기 전에, 이브가 물에 비친 자기 자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서 눈이 거기 붙어버린다. 그 때 보이지 않는 음성이 이브를 내버려 두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이끌어내서 아담에게 데리고 간다. 그리고 아담과 서로 안고 입맞춤을 하는 사랑의 장면이 나온다
– Julia Walker: 이브의자기지식: 나자신을어떻게아는가? 이브는거울에서자기아름다움을봄으로서가아니라, 아담과의관계에서만자신을확인
백설공주의등장인물계모왕비
백설공주의 계모는 늘 거울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
거울의 대답은 “당신은 아닙니다”였다. 여성분들에게 묻는다. 대답이 맞는 말인가? 간 큰 거울이다. 정답이지만 오답. 안 깨진게 다행이다. 상징적: 왜 “당신은 아닙니다”라는 대답이? 왕비의자기도취적시선이왕비를추하게만든다. 그 순간에 그는 왕궁에 살지만 시기와 분노에 시달린다
오늘 설교의 제목: 셀카가 예쁘면 뭐하나?
우리의 문제는 극단적 셀카문화: 극단적인 자기 중심적 시선이다.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라면, 수많은 물에 빠진 영혼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자기 눈에 있는 주름만 보니 문제이다.
하나님이 눈을 기가 막히게 달아 놓아서 스스로 보지 못하게 한 것이 있다. 내 미모이다. 대신 보게 한 것: 상대방의 아름다움이다.
백설공주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내가 함께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본다: 특히 7 난장이. 지극히 상징적이다. 모든 사람이 내려다 보는 사람, 그리고 주변인. 그녀는 그들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섬긴다. 그래서 그들도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모든 만나는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다
사랑: 상대방의아름다움을보는것 그럴 때 상대방도 나를 아름답게 본다.
“이기는 사람에게는”
7절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
“이기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겼다는 것인가, 아직 이기지 않았다는 것인가?
이 말에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의아해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수고하였고 악한 자를 참지 않고 거짓 사도를 밝히고 오래 참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견디고. 낙심치 않았다. “이미이긴줄알았는데?”
예수님은 아니다. 한가지 부족하다 말한다.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왜? 수단이 목적을 대치해 버렸다
춘향이: 변학도의 회유와 고문을 다 견디고 났는데, 막상 이 몽룡이를 보는데 마음이 두근거리질 않는다. 조선시대의 문제는 내 상급이 “신랑”이 아니라, 신랑은 딴데 갔고, “정절”이 상급이 되어버렸다 는 것이다. 정말 행복해요? 아니면 억압이에요?
고전13 “사랑이없으면, 아무것도아닙니다. 내가 내 모 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요일4: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사랑이시기때문입니다.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촛대를 옮기겠다: 자크 엘룰. “주님은 교회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오직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이고 좋은 행실을 가진 교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형식적인 교회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사랑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 사랑이다. 거기에서 시작한다. 가정과 공동체의 시작은 서로 사랑함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리더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을 지켜야한다.
가끔씩 주례나 결혼 축사할 때가 있다. 사랑해서 결혼을 하고, 살림을 꾸린다. 사랑이 근원이고, 사랑이 원동력이고, 사랑이 행복을 주고, 심지어 사랑할 때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 그게 생명나무의 열매이다.
부부가 소중한 가정을 세우느라, 또 아이들 돌보느라 열심히 일한다. 또 서로를 세우기 위해 자기 희생을 하게 된다. 어느날, 열심은 있는데,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결혼했으나 외롭고,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무엇이 문제인지을 분석하고 있다.
왜 교회 다니기 시작했는가?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은혜를 받고, 그리고 공동체의 사랑에 감동해서이다. 사랑에서 시작했고, 사랑이 본질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근원: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첫사랑인 예수를 만날 때 영원한 생명이 생긴다. 공동체의 사랑을 경험할 때, 상처받은 자가 치유를 받는다. 그게생명나무의열매를먹는것
그 사랑을 알 때 나는 예수님을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랑을 세상에 전하게 된다. 함정은 열심을 내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키려다, 예배의 눈물을 잃어버리고, 성도의 교제가 아니라 자기 일에 분주해진 사람이다. 그 특징은 예수가 자랑이 안되고, 공동체가 자랑이 아니라, 자기 열심이 자랑이 된 사람
이기는 것이 무엇인가? 이기는 사람은 자기 열심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첫사랑을 회복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생명을 풍성히 누릴 것이다.
두번째 첫사랑을 하기로 선택하라
5절.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첫사랑: naïve. 순진한 사랑
두번째 첫사랑: second naivete: 이 일을 겪고/ 알걸 다 알고도, 여전히 순진하게 사랑하기로 하는 것이다.
회개: 처음에 하던 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했던 것이, 어떤 계기로 끊겼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왜? 사랑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첫사랑은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첫사랑은 뭘 몰라서 사랑한 것이라면, 두번째 첫사랑은 그래도 사랑하는 것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더불어 두번째 첫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이 발을 닦아준 사람에는 가롯 유다와 베드로. 한 사람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할 때, 끝까지, 자기 생명보다 사랑을 더 소중히 여김
이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이 심판을 말한다 –> 십자가: 죄에 대해 의로우신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그러나 십자가만 있다면?그 결론은 진노와 죽음밖에 없다. 그러나 집에서 애들이 잘못할 때 부모가 진노만 하면?
질문을 던집다: 그 다음엔? 안타까운 것이 있다.그 다음을 말하는 사람도 없고, 그 다음을 이끌어 나갈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부활이 있어야 해요.진노와 죽음이 끝이 되면 안된다. 개인의 삶도, 민족의 삶도 그러하다.공의로 인해 진노와 죽음이 필요하다면, 진노 다음에는 용서를 통한 의롭다 칭함이, 죽음 다음에는 부활이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절망 다음에는 소망이 필요하다. 말을 바꿔서 소망의 인격이 필요하다.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이 말한다.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환난의 상황이다. 죄인 됨: 사람들이 그를 잘못했다고 말한다. 고난의 상황이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고통 당한다. 고립되고 외로운 시간이다. 거절받는 시간이다. 그것은 버림 받은 것을 뜻한다. 사람들이 떠나고, 12제자들은 다 이미 순교했다. 심지어 하나님도 나를 버렸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럴 때 놀라운 말을 한다. 바로 “인내”라는 말이다. 요한은 자기의 상황을 환난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다음이 포기합니다로 나와야하지 않는가? “할 만큼 했습니다.” “지쳤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닌가 봅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는 “인내”를 말한다. “어렵지요. 죽을 것 같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견디어 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정도도 놀랄만한데. 한술 더 뜬다 “책에 기록하여… 교회로 보내라” 그 환난 가운데에서 그는 책을 쓴다. 그리고 그것을 아시아 교회 네트워크의 허브 역할을 하는 7교회에 보내고, 그래서 아시아 전체에 책을 보낸다. 그 내용은소망의 내용이다.그러므로 사람들로 인내하게 하고. 식어버린 마음을 뜨겁게 하고. 자기를 타락과 타협에서 지키게 하는 동기를 준다.
도대체 요한이 누구이길래? 그가 무슨 메시지를 주었길래? 한마디로 요한은 “소망의 사람”이다.
촛불
어두움 가운데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빛이다. 아무리 어두워도 우리는 그 빛을 보게 된다. 요한은 어두움을 비추는 촛불과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빛을 받은 교회도 촛불이 되어, 어둠에서 빛난다. 그 빛을 본 세상 사람들이 그 빛을 향해 온다.
소망은시각의 문제이다. 상황을 초월하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 확신.하나님의 약속에 기반을 둔 것이다. 상황이 당장 좋아진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미 소망이 아니다. 그렇다면 소망이 하는 것은 관점의 변화이다.
소망은 관점의 문제이다. 약속으로 주신 미래가 이미 완성되었다는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소망을 품은 사람의 삶에 임하는 자세와 삶의 방향을 정한다
어느 분이 나에게 말했다. “목사님에게 말 다 안해서 그렇지 힘든 일이 너무 많았다.하나님이 나를 성장시키려고 그러시나봐요.그게 복인데요.” 소망은 씨앗과 같다. 그 소망을 품고, 거기에 끊임없이 물을 주는 사람은 결국에 자신의 삶에서, 혹은 당대가 아니면 후대에라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소망은 생명의 씨앗이 퍼저나가듯 퍼저나간다: 소망을 가진 한 사람이 있을 때, 그의 확신에 찬 말과 행동을 통해 주변 사람들도 소망의 사람들이 된다.
우리가 지금 그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가? 한국 교회가 갖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소망”이다. 소망의 인격이 없다. 그럴 때 그런 사람이 없다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이 소망의 사람을 만드는가?
무엇이 소망의 사람을 만드는가? 그럴 때 소망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닌 것, 즉요한에게 없었던 것이 있다. 건물이나 좋은 시설이 아니었다. 맛있는 밥도 아니였다. 파이프 오르간이나—현대식 최고급 음향도 아니였다. 거대한 성가대도 혹은 화려한 찬양팀도 아니였다.
본문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 하나: “음성”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그리고 교회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들음으로 소망의 사람이 된다. 17절에 소망의 비결이 나온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과 같이 된 나에게 손을 얹고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세요. “두려워하지 말아라”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요한은 돈도 없고, 상황을 바꿀 권력도 없는데. 그럴 때 “두려워 하지 말아라”말의 다음 단어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 믿는 자가 두려움을 이기는 근거는 요한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나는”: ego eimi. 스스로 존재하는 야훼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나와 절대 타자: 나와 완전히 다른 분이시다.
첫째 나는 상황을 바꿀 힘이 없는 자: 하나님은“처음과 나중”이에요: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역사를 심판하시는 분. 그 분이 시작하심. 그분이 마치심.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그분이 마치실 것이다.
빌1:6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장래에 대한 불안해하며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불안할 때마다 기도로 하나님께 미래를 맞기고 평화를 얻는 것이다.
둘째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죽을 수 밖에 없고, 지금 현실에서는 박해로 죽음을 직면한 자이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분”: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분이시다. 그러니 나도 두려움을 용기로, 절망을 소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이기게 해주신다.
그 주님이 나에게 손을 얹고 말씀하신다. 손을 얹는다는 것은절대 타자가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뜻한다. 성찬을 묵상해본다.성찬은 처음과 나중이시고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연합하심을 말한다. 그 주님의 말씀이 두려움을 이기고, 새로운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해 주신다.
그럴 때 변화가 일어난다. 말씀을 듣는 자의 어둠이 걷힌다. 다시 소망으로 장래를 바라본다. 더불어서 말씀을 가진 사람이 세상의 등불되게 하신다: 그래서 교회를 금 촛대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교회는 어둠을 밝히는 촛대이다
이와하시 다케오라는 분이 있다. 그는 와세다 대학 재학중에 시력을 싫어나이가 20세 때맹인이 된다. 심하게 좌절. 자살도 여러 번 시도한다. 신앙이 그를 살린다: 어릴 때 예쁜 그림 카드가 탐나서 주일학교 다님. 그러나 특별한 종교에 대한 기억이 없다. 실명을 하고 어둠 속에서 방황할 때 한번은 그의 가슴을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어릴 때부터 자주 들은 찬송이 들린다“방황하는 자여 돌아오라” 어둠의 밑바닥에 떨어져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못 나올 때, 그는 찬송을 듣고, “아 내가 정말 길 잃은 어린양이구나. 하나님의 곁으로 돌아가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간사이대학에 다시 편입한다. 여동생이 늘 학교에 같이 다녀주었다. 학교 친구들과 교수님들이 도와준다. 그러나 여전히 쉽지 않은 길이라 하루는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그 아내가 말한다. “당신 곁에는 하나님과 내가 있는데 왜 절망합니까?내가 당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겠습니다.” 그가 아내와 함께 영국 에든버러대학에 유학을 간다. 공부를 마치고 간사이대학에 돌아와서 맹인 선교, 맹인 교육, 시각장애자 재활활동을 한다. 자기 집을 열어 일본 라잇하우스를 설립하고 점자 책을 만들어, 시각장애인들에게 빌려준다. 그는 일본 시각장애자들에게 “희망의 등불”로 불린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이 모든 일을 말하고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겠는가? 그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지, 내가 오게 하는 것 아니다. 우리가할 수 있는 것은주님이 나에게도 손을 얹고 음성을 들려주실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10절. “주님의 날에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그는 주일 예배를 드린다. 그것은 홀로 드리는 예배.교회가 박해를 당하고, 자신은 고립된 상황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찾아와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예배의 자리에 나간 것이다.
대하16:9 주님께서는 그 눈으로 온 땅을 두루 살피셔서, 전심전력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이들을 힘있게 해주십니다.
그 기대가 있어서 예배에 임하여 기도한다. 그의 그 기대가. 그의 그 믿음이. 그 사랑이.그 소망이. 성령을 담는 그릇이 된다.
한 성도의 이야기이다.젊어서 그렇게 청년부를 열심히 했는데, 그러면서 열심히 교회생활 하던 선배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너무나 무기력해지고 신앙에 흐지부지해지는 것을 보면서 실망했다. 막상 자신이 신앙을 시작하니, 본인도 한주간 오직 일만 시달리니, 주일날도 예배만 드리고 집에 빨리 가고 싶어지는 것을 경헌한다. 그가 수요큐티에 나오기 시작: 어느날 직장 동기가, 뭔가 변했다고 말하면서, 뭔가 정신 무장을 하고 온 사람같다고 칭찬을 받는다. 그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뭐가 변했나? 수요일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말씀을 살피는 것밖에 없다. 거기서 자신을 찾아온 예수님을 만난다.
예수소망의 40일이 시작한다. 지금부터 1월 두번째 주일까지이다. 주님이 나에게 찾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작정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