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쾌락불신지루

예수쾌락 불신지루: 5. 당신 때문에 살맛 납니다

풍족함 vs 비천함
배부름 vs 굶주림
풍족함 vs 궁핍함

어느 쪽을 원하는가?  친구가 비천해지고, 굶주리고 있고, 궁핍할 때, 그를 동정할 뿐 아니라, 돕기 위해 같은 처지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이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우리 죄와 그 대가를 치루기 위해 왕에서 노예가 되셨고, 급기야는 당시에 노예에게만 가하는 십자가에 달린다.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기 위해 감옥에 갔다.  그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고 가난해 졌다.
빌립보 성도들은 당시에 “급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후 8장)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돕기 위해 자기들이 굶을 각오를 하고 헌금을 보낸다.

그럴 때 그는 나와 같이 피를 흘린 형제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또 교회와 함께 고난에 죽기까지 동참하면, 하나님이 부활의 능력으로 살리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키신다.
바울이 감옥에 갖히니, 대신 성도들이 복음을 전했고, 그가 가난해지니 성도들이 피를 흘리며 그에게 필요한 돈을 보냈다.
빌립보 성도들이 급심한 가난에서 돈을 모아 보내니,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그들의 필요한 것을 채우실 것을 약속하신다.

성도의 교제와 섬김은 부활을 믿고, 십자가의 길을 갈 때 가능하다.

예수쾌락 불신지루: 4. 허물어야 새로 세웁니다 Part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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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에서 가장 부자가 되는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우리가 굉장한 일을 해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다.”
“Being the richest man in the cemetery doesn’t matter to me … Going to bed at night saying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 … that’s what matters to me.”

– Steve Jobs

우리 교회를 생각해본다.  지난 3월8일 주일은 교회 시작한지 딱 1년되는 날이다다.

만일 우리 교횔ㄹ 흔히들 말하는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다른 교회와 비교한다면 이것도 없고 저것도 부족하다.  아직도 멀었고, 특별히 survival 즉 살아남는 것에 대해 위협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에는 기쁨이 없다.

관점을 바꾸어 그동안 하나님이 하신 위대한 일들을 생각해 본다.  교회에서 또 소모임에서 만난 분들 중에서 예수님을 만나 삶에 중요한 변화가 생긴 분들이 있다.  인생에 대한 긍정적 관점을 보면서 예수님께 자신을 맞기겠다고 하는 고백도 있었고, 소모임을 이렇게 좋아하게 될지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관계에서 실망하면서 몇년동안 아무도 안 만나고 칩거하다가 다시 모임을 나의 공동체로 받아들이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 사람도 있었다.   깨지기 직전의 부부관계가 회복되기도 하고, 무너진 삶을 일으키게 되고,  병든자가 치료받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도 이제 갓난아기에서 벗어나 조금씩 걸음마를 시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공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매주마다 성공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또한 행여나 당장 내일 교회를 정리하덜도 그것은 실패하여 끝장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예수쾌락 불신지루: 2. 누더기를 입은 예수님

빌립보서 2:1-11
2015년 2월 22일 주일 권혁수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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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뉴런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태어난 지 몇달 안된 아기도 엄마가 웃으면 같이 활짝 웃고, 엄마가 울면 같이 운다.  정서 공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사 소통이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감정을 공유할 때 서로 통하는 것이다.

김정운 교수는 사회적 지위가 올라갈 수록 입꼬리가 처진 것은 볼 근육이 마비 됐다는 뜻이라 말한다. 다른 말로 함께 웃고 웃는 공감능력을 점점 상실해 간다는 것이다. 반면에 인상을 찌푸리는 이마의 근육은 많이 쓰면서 주름이 생긴다.

잘 되는 듯 하다.  세상에서 볼 때는 성공한 듯하다. 그러나 더불어 웃을 수 없게 된 것이 행복한 것일까 아닐까? 점점 공감해주는 사람이 줄어들어 외로운 것이 행복한 것일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2:1-2)

마음에 확 와 닿지 않은가?  하나님은 이것이 내 삶에서 구현하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격려, 위로, 교제, 동정심, 자비를 경험하면 같은 생각, 같은 사랑, 같은 뜻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 즉 코이노니아이다.

이 일을 경험하면, 여러분 입꼬리가 내려가겠어요? 올라가겠어요? 그래서 바울이 뭐라 합니까?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교회에 올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가신 분들이, 교회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에는 입꼬리가 올라간 분들이 되기를 바래요. 이게 하나님이 우리가 교회에 왔을 때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이걸 이해하시려면 그 당시 로마의 도시였던 빌립보의 문화를 알 필요가 있다. Joseph Hellerman이라는 신약 학자가 있다. 로마는 고대 지중해를 둘러싼 국가들 가운데 지위가 가장 중요시 여긴 사회였다. 로마의 계층은 노예-해방인 (freed man)-로마 시민-기사 계습-원로원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이 당시의 의복이다. 해방인은 특별한 모자를 쓸 수 있었다. 시민은 토가를 입을 수 있었다. 로마 시민은 상류층은 아니다.  그러나 빌립보에는 로마 시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걸 입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어떻게 쳐다봤겠는가?  기사단은? 토가를 입을 뿐 아니라, 금반지를 낄 수 있었다. 그 반지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해 준다. 요새식으로 하면 take out 종이컵을 들고 있는 셀카를 찍어서 올렸는데, 살짝 금반지가 보이게 하는 것이다. 원로원은? 토가를 입고, 금반지를 낄 뿐 아니라, 자색 줄이 있는 토가를 입을 수 있었다.

어느 역사학자는 “To the Romans, being is to be seen.”  “로마인들에게는 존재한다는 것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이다.”

빌립보 사람들은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불행이라 생각한 것입니까? 사람들 앞에서 명예를 얻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잃는 것이 가장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3절에서 “겸손한 마음으로”라는 말씀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다.  로마에서 “겸손해진다”라는 것은 단순히 마음 자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류층의 지위를 잃고 떨어진 것을 “겸손해진다 humbled”라고 말한다. 그래서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를 8절에서는 예수님이 “자기를 겸손하게 하시고"를 우리 성경에서는 “자기를 낮추시고”라고 번역을 한다.

그 극치가 무엇인가? 십자가이다.  로마에는 다양한 사형 방법이 있었지만, 가장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은 십자가였다. 의복이라는 것이 당시에 가진 상징체계를 이해하시면, 벌거벗겨져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의 의미가 더 의미가 다가온다. 그것은 단순히 고통을 가하거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치와 치욕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형벌은 오로지 노예만 받게 되어있었다.

3절과 4절을 읽으면 이게 무슨 말인지 더 이해가 된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을,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원문을 보면 “내가 상대방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고, 상대방을 나의 상관으로 대하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이 말 한마디가, 읽는 사람들에게 충격이 되었을지 이해가 되세요? 이 말은 당시의 문화에 대항하는 말이다. 다들 올라가려 하지, 아무도 자발적으로 낮아지려 하지 않았다.

그럴 때 왜 바울은 이러한 말을 하는가?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웃으며 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명예와 지위는 중요한 것이다. 존경받으며 사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고, 사람들이 거기에 목을 멜 때, 대가를 치루기 마련이다.  자꾸 비교하게 되고, 경쟁하게 되고, 조금만 잘 되면 허영심이 생기고, 부풀려서 자랑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내려다 보게 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만 잘 되려고 하는 사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면 추구할 수록 점점 외로워지고 얼굴에 웃음 대신에 입꼬리가 내려가게 된다.

게다가, 그렇게 하면 할 수록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는 일을 하게 된다. 교회는 기관이나 조직이기 이전에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다. 2절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으샤으샤할 때는 교회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가요. 교회 안에서 서로 내가 높니 니가 높니 하고 경쟁할 때에는, 교회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다. 교회가 점점 흐지부지하게 된다.

여기에 있는 말씀은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내가 웃으며 살기 위해 필요한 말씀인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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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쾌락 불신지루: 1. What Has Happened to Me

빌립보서 2:12-21
2015년 2월 15일 주일 권혁수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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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갇히고, 쇠사슬에 묶이고, 그래서 하던 사업이 중단되고, 경쟁자들이 그 틈을 노려 나를 이기려 한다면?  그것을 “괴로움”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사연을 이야기하고는 “그렇지만 어떻습니까”(새번역)라고 말한다.  그것은 원어의 뜻을 번역하긴 했지만 뭔가 어감이 와 닿지 않는 번역이다.
바울은 그것을 “ti gar”라고 말한다.
John Ortberg는 그것을 “So What” “Big Deal” “Who Cares” “Whatever”로 표현한다.  내뱉는 듯한 그 어감이 느껴지는가?
나는 “그래서 뭐”라고 번역한다.

감옥에 갇혔다.  —  그래서 뭐!
쇠사슬에 묶였다.  —  그래서 뭐!
사업이 중단됬다 — 그래서 뭐!

내공이 대단하지 않은가?  이정도 되야 예수 잘 믿는 것이다.

여기서 Ti Gar에 대한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  이것은 결과적 Ti Gar가 아니다.  과정적 Ti Gar이다.

어떤 분은 이 말을 들으면 스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번뇌가 많은 속세의 연을 끊고, 산에 들어가 앉아서 “옹~”하고 도 닦는 분.  이와 비슷하게 Stoic 철학에서 그것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런 것이 아니다.만약에 그러하면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종교적 열등감과 소외감만 들 것이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현실에 대해 외면하고 전혀 그런 일이 안 일어났다고 하거나, 혹은 그것을 잊기 위해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오늘 이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그 상황을 인정하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상황에 짓눌리고 으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황에서 창조적으로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것이다.

이 말을 하고, 나는 “그게 뭐"라는 것을 과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예전에 어머니 친구분 중에 작가가 계셨다.  그분이 쓰신 수필책이 집에 있었다  책 제목이 “예수쟁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어릴 때 읽은 책이라 내용이 잘 기억 안 나는데, 그 중 이야기 하나가 꽤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대충 내용이 이렇다.  작가에게 하루는 전보가 날아온다.  내용이 “친어머니가 소천 하셨으니 빨리 고향집으로 내려오라“ 이 소식을 받고 작가가 급하게 고속버스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데, 여전히 실감이 안 나더라고 한다.  그런데 버스가 이제 목표지에 도착하고 자기를 마중 나온 자기 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라고 한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면서 어머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이야를 한다.

심리학자들이 이것을 뭐라고 하나?  큰 일을 겪을 때 제일 먼저 겪는 것은 “부정“의 단계이다.  그 일을 머리로는 알겠지만, 아직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단계가 없을 수는 없다.  그 단계를 거치고 나서, 그 다음에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고,그리고 받아들이는 순간 다시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고, 오히려 과정이 더 중요하기도 하다.

만약에 바울이 결과만 보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열정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누비며 복음을 다니던 사람이 작은 단칸방에 갇혀 있다.  그러면 빌립보서의 내용이 “기뻐하고 기뻐할 것이다"가 아니라, [목 잡고] “으~윽”이 돼었을 것이다.  그의 심정은 “억울하고 분하다” 였을 것이다.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갇힌 걸 보고 그를 더 괴롭게 하려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앞뒤 문맥은 다 잘라먹고, 결과만 보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과정을 지나가는 힘"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걸 알 수 있는 게, 바울은 “story telling"을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자신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삶이 변한 이야기가 세 번이나 나온다.  갈라디아서를 봐도 자신이 예수를 믿은 일대기를 말하면서 자신의 오직 믿음이라는 결론을 말한다.  고린도후서에도 자신이 아시아에서 죽을뻔한 일과 거기서 얻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오늘 빌립보서 본문의 내용은 바울이 자기가 감옥에서 겪는 일을 간단한 이야기로 쓰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말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6.25 전쟁을 겪으신 분들에게  피난간 이야기 해달라고 하면 생생하게 말씀하신다.  남자들은 군대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그것은 삶의 갑작스러운 단절, 자유의 박탈,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건이 내 삶에 일어날 때, 그걸 이야기 하고 또 이야기함으로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짧은 내용이지만, 그것은 바울이 감옥에서 겪은 이야기이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특이하게, 창조적 능력은 한계가 주어질 때 오히려 극대화 될 수 있다.  그럴 때, 그 작은 곳에서 자신의 삶을 주도할 수 있게 된다.

  1. 그는 자신이 묶인 일을 가지고, 사람들을 복음의 포로로 만드는 기회로 삼는다.

복음의 일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경비대와 함께 사슬을 메었다  그래서 경비대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당시 경비대는 쉽게 말하면 황제의 친위대이다.  그들은 로마의 귀족들이었다.  바울은 이전부터 로마로 가고 싶어했다.  가면 전략적 이유로 그 나라를 움직이는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나,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이제 그들이 바울을 찾아온다.  그리고 하루 종일 좋으나 싫으나 바울과 함께 있어야 한다.  이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믿게 된다.

나는 한계의 상황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그것으로 이루신다.

“빌4:22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특히 황제의 집안에 속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

  1. 보너스로 하나님이 덤으로 하나 더 역사하신다.

전에는 바울이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워낙 뛰어나서 바울같이 복음을 전할 엄두가 안 났다.  이제 바울이 복음에 갇히니 성도들이 복음을 전한다.

  1. 하나님이 이걸 하나씩 하나씩 보여주시면서 바울을 살살 달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이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바울은 요새 젊은이들과 비슷하다.  아니에요  그 이상 되는 사람이에요.  그는 자기가 너무 좋아해서 다른 걸 다 버리고 복음을 전한다.  이제 그 길이 막히나 싶었더니, 이제는 하나님이 더 잘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바울이 “하나님 왜 나를 여기에 처박아 놓으셨습니까?”라고 했을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하나씩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던져 놓은 줄 알았더니, 하나님이 감옥에 따라 들어와 같이 계십니다”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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