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xuality Q&A: 1. 개방적 성관계 vs. 보수적 성관계

MP3 다운로드

이 주제는 아마 교회에서 익숙하지 않은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몇년간 한국 사회에서 겪은 일들을 보면,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이다. 오늘날 성에 대해 세대간 또 하부 문화간 많은 논란들이 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성에 대한 정리 안된 가치들의 혼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性에 대한 정리 안된 가치들의 혼재

대한민국 자체가 급격하게 문화와 그 가치간이 조각나고 있는 상황이고, 특별히 세대차가 급격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문제가 아마도  “성”이라는 문제일 것이다.  한국 교회도 대한민국 안에 있기에, 교회들도 급격하게 다원화 되고 있으면서 어찌해야 할 지 모르고,  “성”이라는 문제가 거기서 대표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국 사회적으로는: 굳이 통계자료의 숫자를 보여주지 않더라도, 젊은 세대로 갈 수록 전통적인 성에 대한 개념에서 급격하게 멀어지고 있다. 그것은 결혼과 성관계에 대해 별개로 생각하고,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취향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교회는 보수적인 성에 대한 가치관을 옹호하는 듯 하다.  그러나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한국 전통의 가치관을 옹호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또한, 성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교회들 안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성적인 타락이 우리에게 충격이 된다.

젊은이들의 특징은 권위 자체에 순복하기 보다는, 인격적 관계와 신뢰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설득력 있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교회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건강한 성에 대해 가르쳐야 하는데, 그것을 성경에서 무엇이라 말하는 지 배운적도 없다.  따라서 기성세대의 성에 대한 주장은 다음 세대에게 별로 효능이 없다.

한편, 그 외에도 한국 사회는 그 밖에도 몇가지 성에 대한 핫 이슈들이 떠오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최근에 간통법이 폐지가 되었다.  그리고, 또 동성연애에 질문이 크게 대두되면서 첨예한 논리가 공격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성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큰 주제인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그러나, 교회는 그 오랜 기간 성에 대해 설교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다.  우선 그 주제 자체가 교회에서 말하기에는 불편하여 금시기 되던 것이다.  그저 부모들이 교회에서 바랬던 것은 우리 애들이 사고 치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해 주세요 정도였다.  그래서 그 침묵의 대가를 교회는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다.

성에 대한 두 가지 관점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평생 목회를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어느 정도 일어나면 그곳을 떠나서 다른 지역에 가서 교회를 세웠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교회를 하나씩 세워놓으면, 그 교회를 중심으로 주변에 복음이 자연스럽게 확산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울이 없을 때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생겨난 질문이나 문제를 편지로 써서 바울에게 보낸다.  고린도 전서에는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 바울이 답변을 하고 있다.

바울은 편지에서, 고린도 교회에는 성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는 13절에 나온다.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여기서 “음식”과 “배”는 성에 대해 빗대어 말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식욕과 같은 것이라는 관점이다.  음식이 필요하면, 먹는다.  마찬가지로 성적 관계가 필요하면, 가서 관계를 맺는다. 성은 단순히 식욕과 같은 것이며,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의 물질 세계의 이해에서 들어온 관점이다.  영적인 것은 불멸하지만, 물질 세계라는 것은 사라질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속이 중요하지, 몸은 부수적인 것이고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도, 하루 아침에 나의 세계관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가치와 판단,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게 점점 기독교 세계관으로 변해 나가는 것을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말한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항구 도시였다.  따라서: (1) 미신이 많다. 그리고 (2) 성적으로 개방적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 중에는 , 예수 믿고도, 그 문화의 가치를 가지고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성이라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이 아니니,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원하면 가서 관계를 맺으라. 영혼만 구원 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 중에는 심지어 창녀와 관계를 맺고도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성도들까지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관점은 7:1에 나온다.

“남자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많은 주석가들이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인용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전 것과 거의 정 반대의 관점이다.요점은 “성은 더러운 것, 천박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특별히 “영적인 이유”를 들어서 자신의 배우자와 관계 하는 것을 거절하고, 그걸 요구하는 배우자를 천박하게 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첫번째 주장과 정 반대의 주장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 문화에서 영은 선한 것이고 우얼하며, 물질은(그리고 우리의 육체는) 악한 것이며 열등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를 낳는데에 성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거룩한 사람이라면 거기서 멀리해야 한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이러한 주장들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자기를 정당화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이렇게 되도록 하는 가르치거나,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시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은 2000년 전에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생긴 관점이지만, 한국에서도 역사적으로나 오늘날에도 거의 이 두가지 관점이 지배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공부해 보면 이 둘다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 둘다 앞에서 말했지만, 세속적인 관점이 교회로 흘러 들어온 것이다. 즉 육체적인 것은 열등하고, 영적인 것은 우월하다는 가치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이전에 세상에서 살던 가치관과 전제를 가지고 살아서 변화가 필요했던 것과 같이,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세속적 가치관과 전제를 가지고 산다.  그것을 다 배격할 것도 아니다.  어느 문화에든 성경의 가치관과 전제와 잘 맞는 부분이 있다.  이것을 전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다.  어느 문화에든 성겨의 가치관과 전제와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예수 믿고 산다는 것은 성경을 기준으로 세상의 문화를 비평적으로 사는 것이다.  세상 문화를 놓고 그 심층적 가치관과 판단 또 이론을 평가하고, 또 표면적인 행위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 중에 성경적인 것은 수용하고 신앙과 연결시키지만, 성경과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변화 혹은 대치시켜야 한다.  그것이 회개하거나, 교육, 훈련등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주의할 점은 이 모든 논의가 마치 자신의 가족에게 하듯 섬세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고, 지적-신학적 날카로움을 사랑으로 잘 감싸줘야 할 것이다.

바울의 권고

바울은 이 두 가지 관점이 다 틀렸다고 말한다.

음행을 피하십시오

바울은 첫번째 주장에 대해  “음행을 피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음행이라는 것은 “πορνεία”(porneia 포르네이아)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요?  이 단어는 결혼이라는 언약의 관계 밖에서의 성관계를 뜻한다.  이 단어는 간음이라는 단어, 즉 결혼을 한 사람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다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한다.  즉 결혼을 하였던지, 그렇지 않던지, 결혼한 사람 이외의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그것을 놓고 “피하십시오”라고 말한다.  “결혼의 관계 밖에서 성관계를 맺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피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영어로 하면 flee: 도망가라는 뜻이다. “배우자 이외에는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이것은 아까 두 가지 주장 중에 두번째 관점, 보수적인 관점과 같은 것 아닌가?  아니다.

7:3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십시오.

바울은 성에 대한 두번째 주장, 즉 “성은 천박한 것이니 멀리 하는 것이 좋다”라는 것도 배격한다.  그는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은 나쁜 것이 아니다. 혹은 애를 낳는 기능만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준 선물이고, 기쁨이며, 두 사람이 서로가 원할 때 그것을 내주고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성에 대한 개방적인, 혹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한 몸이 됨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창녀와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는 창세기의 구절을 인용한다.  여기서 “몸”은 단순히 영과 대조되는 육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전인적 인격체를 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나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라고 말한 구절은 우리의 세포에다가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전인적 인격체: 즉 나의 영혼, 감정, 가치관, 이성, 몸에 전인적으로 성령이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한 몸이 된다"라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결혼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그것은 외적인 연합 뿐 아니라, 즉, 내면은 분리된 체로 혹은
몸만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결합을 했다는 것은, 내적으로도 연합을 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창조로 부터 오는 물질 세계와 우리 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온다. 하나님이 땅이라는 물질 세계를 만드시고, 그 속에 있는 것을 만드시면서, 매일 같이 자신이 만드신 것을 보시고 “좋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제6일에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매우 좋다”고 말씀하시고, 축복하셨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시고, 축복하신 것은, 영적인 부분 뿐 아니라, 흙으로 빚으신 육체를 포함한다.  물질의 세계는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고, 영적인 것보다 덜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남녀간의 육체적 연합을 우리와 주님이 하나가 되는 것에 비유한다.  바울은 남녀가 하나가 되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이며, 그 안에 하나되는 기쁨과 완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뜻을 이해하기 위해 두 명의 주석가를 인용해 보자.

“따라서 성의 가치를 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의 일이 오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바울은 1세기의 문화적인 전제보다 훨씬 앞서 나가서, 성 행위를 전인격이 동원되는 친밀함과 자기 헌신이 이루어 지는 것으로 본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의 ‘주변적’ 기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 Anthony Thiselton

“[바울은] 사람의 성에 대해 심리학적인 통찰력을 보여주며, 이것은 1세기의 기준으로 본다면 특별한 것이다.   …  그는 그것이 인격체 전체가 관여하여 표현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며, 자신을 열어 보이고 자신을 헌신하는 독특한 모드를 구성하는 것이다.”  – F. F. Bruce

무슨 말인가?  바울의 성에 대한 관점은 그 당시보다 발전한 것이다.

하나님은

  • 보수적 관점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성은 천박한 것이고, 쉬쉬해야 할 것이 아니다.
  • 또한 자유주의적 관점에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성은 자기 입맛을 채우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며, 자기 표현만을 이해 만든 것도 아니다.

성이라는 것은 상호적이고, 언약적인 것이며, 즐거운 선물이며, 자기 완성이기도 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인격적인 변화와 완성을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몸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보이는 것 아닌가?  그것은 또한 나의 삶 전체의 연약함도 서로에게 드러내고 맡겨야 한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 상대방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맞기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면서 둘이 인생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것을 상징한다.  상대방의 육체를 취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에게서 나머지 부분에 대해 간섭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유를 누리겠다고 하는 것은, 결코 “쿨~”한 것이 아닌 것이다.  법적으로,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감정적으로, 모든 면에서 서로에게 헌신해야 한다.  남녀가 육체적으로 결합했다는 것은 단순한 외적 결합을 넘어 전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한 연합은 친밀함과 헌신이라는 것이 있어야 되는 것이며, 더불어서 그 연합을 통해 친밀함과 헌신이 강화 된다.  즉 상호 순환 적인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의 문제

포르노그래피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로지 육체적인 결합만을 강조한 것이다.  내면적인 부분, 영적인 영향, 그리고 헌신이라는 것을 때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이해한 것처럼 그것은 성에 대한 건강한 이해가 아니다.  그럴 때, 상대방의 내면과 인격에 대해, 그의 인생에 대해 관심이 없고, 오로지 육체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사람을 고기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다.

둘째, 언약적이 아니라, 이기적이다.  자기 중심적인 성이다: 내가 기분 좋고, 내가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상대방과의 언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방을 소비하는 것이다.

너무나 “나”에만 집중해서, 심지어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거기에는 관계에서 오는 마찰도 없다. 현실에서의 관계는 달콤함도 있지만 실망도 있고, 사랑이 있다면 지칠 때도 있고, 황홀경이 있다면 구린내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 Mark Regnerus가 자신의 책 Premarital Sex in America에서 말한다.  사람들이 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상식이 여러개 있는데 그중에는 “포르노그래피가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연구해보면,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가 모든 사람, 포르노 그래피를 보는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1. 포르노그래피를 사용하는 사람은 황당할만큼 비현실적인 외모와 사교성을 기대한다.  연인이나 배우자가 어떻게 생겨야 하고,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 지에 비현질적 기대를 한다.
  2. 포르노그래피를 사용하는 상당수의 남자들이 실제 관계의 어려움과 결혼에서의 굴곡에 대해 잘 참아내지를 못한다.  그래서 실제로 결혼하려고 하는 숫자가 줄어든다.
  3. 따라서 모든 여인들이 성적인 행위나 외모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도록 강요를 당한다.  포르노그래피에 나오는 이미지와 스타일에 맞추도록 한다.  패션디자이너들이 그렇게 하고, 남자친구들이 요구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에 대해서 완전히 반대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바울은 남녀간의 육체적 연합을 상징적으로, 우리와 성령, 즉 하나님과의 연합을 또한 표현한다.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영이 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고,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충격적인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9 ….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10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11 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게 안 맏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게 고린도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 교회의 모습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심으로, 우리에게 헌신된 언약의 관계를 유지하신다.

에베소서에서는 바울이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님과 결혼하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것이 은혜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러니, 지금 이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면서, 우리가 변화되고 새로워져, 하나님의 성전다운 삶을 살도록 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알 때, 우리는 또한 서로에게 그렇게 대하게 되는 것이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